‘낙관’이라는 이름의 핵 카드
  • 워싱턴·김승웅 특파원 ()
  • 승인 1994.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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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통신



 북한의 핵외교를 주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김일성인가. 김정일인가. 아니면 워싱턴 외교가에 널리 알려진 미·북한 고위급 접촉 창구의 북한측 대표 강석주 외교부부장인가. 이같은 질문을 워싱턴에 온 한승주 외무부장관에게 했더니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답변은 솔직해 좋으나 문제는 심각하다. 일국의 외무부장관이 상대측 외교 전략의 실세가 누군지를 모른대서야 그 장관에 그 정부, 그 정부를 믿고 살아가는 그 국민 모두가 한심하다는 문제가 생긴다. 한장관은 대신 비슷한 사례를 들어 북한측의 핵외교 실상을 공개했다.

 "최근 김일성을 만나고 온 빌리 그레이엄 목사 일행을 통해 들었습니다만, 김일성은 ‘통상 사찰’과 ‘특별 사찰’이 뭔지를 모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북한 핵 사찰 문제에서 통상 사찰과 특별 사찰은 알파요 오메가다. 지난 16일 다시 핵사찰을 받겠다고 수락한 북한측의 변덕은 통상 사찰을 받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토록 중대한 ‘통상’ ‘특별’의 의미를 김일성이 모른다는 사실을 김일성의 늙음이나, 이를 전한 그레이엄 목사의 인식 부족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레이엄 목사에게는 한국말을 한국 사람보다 더 잘하는 평화봉사단 출신 미국인 통역이 수행했고, 이 통역의 말대로라면 김일성의 총기나 지력은 ‘80객이란 것이 의심스러울 만큼’ 또렷하다.

“김일성, 통상 사찰과 특별 사찰 의미 몰라”
 이토록 총명한 김일성이 통상과 특별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승주 외무부장관의 답변은 바로 이 대목을 해석하는 데 무게를 싣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잘 모르겠다”는 외교적 겸손은 이 요점으로 대화를 끌고 가기 위한 물꼬처럼 느껴진다.
 “북한 핵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은 한마디로 단순한 것 같습니다. 핵을 카드로 삼아 미국과 수교를 성사시켜라. 그리고 경제원조도 받아내라. 이렇게 아래 사람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A에서 B를 이루는 것으로 족하지, B에 이르기까지 치르는 갖가지 우여곡절이나 전술전략은 아래 사람들의 몫입니다.” 한장관이 파악한 대로라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탈퇴 유보→사찰 수락→사찰 거부→사찰 재수락으로 반전을 거듭해온 북한의 핵 협상 자세는 어떤 일관된 정책의 구현이라기보다는 김일성의 지시를 수행하는 ‘아랫것’들이 무분별과 무작위로 저지른 전술전략의 파편일 뿐이다.

 B를 이루기 위해 아랫것들 사이에 때로는 경쟁적으로, 때로는 합심해서 만들어낼 책략이 바로 북한의 핵전략이다. 이 전략은 김일성 한 사람을 향해 마련된 보고용 건수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전략 하나하나를 잇는 연결 고리가 채워져 있지 않다는 특징을 내보인다.

정치학자의 말장난으로 치부된 낙관론, 결국은 사실로
 한장관의 논리는,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나 유엔안보리가 소집되기 전이라도 세가 불리하다 싶으면 능히 핵사찰을 수락하고 말 것이라는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핵사찰 거부를 39년 나치의 체코 침공이나 60년대 쿠바의 핵미사일 반입 같은 위기 상황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얘기였다.

 한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한 시기는 국제원자력기구·유엔안보리 회의 소집불가피론으로 위기감이 팽배해 있던 2월10일 전후였던 만큼 이곳 워싱턴 언론가에서는 그의 낙관론이 외교를 모르는 정치학자의 말장난 정도로 가볍게 치부됐다. 그는 “탁 까놓고 말하라, 북한 핵 문제를 대처할 비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없다”고 순순히 자인했다. 그는 또 “북한 핵을 둘러싼 요증 한국의 실정이 능수능란한 외교관을 필요로 할 때인가, 아니면 비장의 카드도 못가진 학자를 필요로 할 때인가”라는 가시돋친 질문에 대해서도 “언젠가 그 문제를 소상히 답변하겠다”라고만 밝힌 후 서둘러 캐나다로 떠났다.

 북한 핵에 관한 한장관의 낙관적 전망과 진단은 그가 캐나다로 떠난 지 정확히 나흘 만에 사실로 입증됐다. 북한이 핵사찰을 다시 수락했다는 빈발 특신이 16일을 기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이 낭보가 전해진 다음날, 한장관은 워싱턴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흡사 내기에 이긴 소년처럼, 예의 수줍은 미소를 흘리며 참된 의미의 지략과 담력은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의 소유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외무부장관으로 발탁한 것은 김영삼 정부의 성공사례로 평가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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