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섹스, 감상주의로 포장
  • 한수산(작가) ()
  • 승인 1994.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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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韓水山 특별기고 / 일본 문화 본질은 상업성…윤리 규범으로 ‘저질’ 극복

일본의 크리스마스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이것은 어쩌면 일본 대중문화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현일수도 있다. 크리스마스는 일본인에게 그리스도 탄생을 기뻐하며 경건해야 할 성스러운 날이 아니다. 상업주의와 결탁한 환락과 상품의 세일이 있을 뿐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시내 호텔 예약이 이미 한여름이면 끝나는 기현상이 이루어지는 곳, 도쿄. 본질이 문제되지 않는 나라라는 뜻이다.

 일본 대중 문화의 본질을 집약해서 가장 다양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에 가부키가 있다. 대중 사회 이전 일부 계층을 향유자로 하는 고급 문화도 아니었고, 기충을 이루는 토속적인 전통 문화와도 차별성을 두면서 그 사이에서 서민과 호흡하며 자생력을 길러온 대중 연극이다. 그러므로 대중 문화가 가지는 소비성, 오락성, 저질적 요소와 함께 가부키는 일본 대중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소재에서부터 그렇다. 3대 레퍼토리의 하나인 <주신쿠라>가 보여주는 사무라이 극에서부터 유곽 요시와라를 무대로 펼쳐지는 섹스와 폭력, 그리고 거기 얽히는 서민의 해학과 인정들…. 위로는 정치 권력의 암투에서부터 밑으로는 일본 서민들이 그렇게도 즐기는 목욕, 그 목욕탕까지를 무대로 삼는 것이 가부키이다.

 4백년 가까운 역사를 통해서 이 대중 오락연극은, 단순한 전통극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인의 서민 정서, 그들의 ‘재미’와 부침을 같이해 왔다. 그러므로 가부키의 소재나 구성을 통해서 일본 대중 문화의 원류 혹은 그 원점을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일본의 대중 문화가 뿌리 박고 있는 서민성이다. 가족·이웃으로 연결되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그 가치를 추구해 나가는 이 서민성은 일본 대중 문화의 한 특질이다. 그 주조를 이루는 것이 정겹고 서러운 인정극과 잔잔한 휴먼 스토리들 이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오토코와 쓰라이요(男は つらいよ)이다. 세계최장의 기록, 40여 편의 속편을 넘어서서도 해마다 한두 편씩 제작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이 영화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다음으로, 대중 문화의 전범이 되는 것이 ‘재미’이다 일본어로 ‘오모시로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철저한 상업성이다. 가부키에서 몇 초 안에 주인공이 옷을 갈아입는 변신, 화려한 의상, 눈이나 꽃가루가 객석에까지 날리게 하는 무대의 과장된 사실성도 결국은 관객에게 제공하는 재미이다. 그리고 이 재미란 서민의 상식과 도덕성에 대립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가진다.

 이처럼 철저한 상업성은 문학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추리물에서 권력과 정치 뒤에 도사린 부패를 소재로 끌어올린 마쓰모토 세이초, 남녀 문제의 비극성을 다룬 미나카미 쓰토무의 소설들은 높은 문학성과 통속성을 겸한 작품으로,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별을 어렵게 만들어 왔다. 이것은 또 다른 일본 문학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왔다. 다음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사무라이로 대변되는 일본 대중 문화의 상무 정신, 달리 말하면 폭력과 잔혹을 미화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영화는 이미 사양 산업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사무라이 영화의 스타 가쓰 신타로의 몰락은 어쩌면 일본에서 사무라이 영화의 종언을 고하는 하나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이제 일본 관객은 사무라이영화를 찾지 않으며, 그러므로 제작조차거의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대나 구성이 다르다고는 해도 사무라이 영화가 가졌던 폭력·잔혹성의 흐름에 야쿠자물이 있다. 뉴스 화면을 보는 것 같은 사실성과 잔혹한 범죄 현장을 재현해 관객을 사로잡았던 야쿠자영화도 이제는 센티멘털리즘으로 둔갑해 버렸다. 아쿠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그 아내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들이다.

 일본의 대중 문화에서 무엇보다도 특이하며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은 섹스의 상업화가 아닐까 싶다. 정상급 텔런트들조차 텔레비전화면에서 젖가슴을 드러낸다.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이 일본인의 성 개념이다. 섹스는 일본에서 농촌을 기반으로 성신중배와 연결되어 주술적 성격의 민속 예술로 발전해 왔다.

눈물 강요하는 센티멘털즘
 이것이 귀족 문화에서는 단순한 ‘호색’으로 멈추지 않고, 귀족 사회에 대한 정치·도덕적 압력에의 반향으로 변용되었다. 그후 섹스가 풍류와 연결되는 미의식으로 발전되었고 여기서 ‘시키도(色道)’라는 것을 만들어낸 일본이다. 유객과 유녀 사이에 격식을 만들어내고, 성희의 섬세한 예절과 섹스의 테크닉을 정형화했다. 52년에 제정한 매춘방지법이 58년 4월1일부터 실시된 나라. 일본의 성 문화는 이토록 긴 역사적 지반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대형 영화제작사들이 제작 편수를 줄이면서 경영 합리화를 꾀할 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핑크’ 영화라고 불리는 외설 영화들이다. 우리가 일본의 저질 외설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대체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대중 문화를 감싸고 있는 당의정으로서 일본인의 감상주의가 있다. 대중이란 비합리적이며 다분히 정서적인 존재다. 그들의 말로 ‘심정적 표현’이라고 하는 이 감상주의는, 이성에 반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표현 행위이다.

 일본의 가요에는 그 가사에 정경 묘사가 많다. 게다가 속담이나 인생 지침서 같은 문구들로 가득차 있는 것 또한 특징의 하나다. 듣는 사람의 정서에 호소하는 힘이 거기서 나온다. 그래서인지 엔카 가수는 무대에서 우선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할 만큼 울고 또운다.

 엔카 가수만이 아니다.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에 넘쳐흐르는 것 두 가지를 든다면 눈물과 살인일 것이다. 은퇴하는 운동 선수가 울고, 우승한 선수가 울고, 결혼하는 신부가 울고, 신부의 아버지가 울고, 가수가 노래하며 울고, 객석의 관객이 울고‥‥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눈물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것 또한 일본 대중 문화의 한 속성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할복하는 장면이 있다고 하자. 배를 가른 자의 피가 횐 옷을 붉게 물이며 흘러내려 그가 앉아 있는 흰 모래 위로 스며 나간다. 그 위에 사쿠라 꽃잎를 날려 떨어진다. 죽음의 사실성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이 섬세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도금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일본의 센티멘털리즘인 것이다.

 대중 문화의 저질성이란 일본에 국한한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대중문화의 피폐를 가리켜 1억 국민의 총 백치화라고까지 말한다. 문화의 발신지가 대중에 대한 이윤 추구와 기호에만 영합할 때 저질 문화물의 양산과 상품화는 당연한 것이고, 이 때 대중 문화는 저속·퇴폐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일본의 대중 문화가 그 국민들 사이에 놓이는 가치, 즉 자리매김이다. 우리와 달리 대중문화의 영웅은 일본에서 ‘국민적’추앙을 받는다. 그리고 특이하게 일본의 대중은 이들에게 윤리적으로 규범이 되는 사생활을 요구한다. 공식석상에서 애국가까지도 틀리게 부르는 조용팔과는 다르다.

 국민적 만화가가 죽었을 때 2시간짜리 텔레비전 추도 방송이 마련되고, 사회면 전면을 뒤덮다시피 하는 신문 기사가 이어진다. 스모계의 영웅 지요노후지가 우승했을 때 NHK의 이부서는 이렇게 목메어 소리쳤다. “가정을 소중하게 아는 지요노후지, 그가 또다시 우승했습니다.” 스포츠 스타의 사생활에도 이토록 덕성을 요구하는, 그렇게 해서 대중 문화의 질을 지탱하는 사회적 존경심 또한 일본 대중 문화의 특이한 점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기타노 구니카라(北の國から))>나, 사회의 가장 작은 틀인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일본 정신을 지켜가려는 노력들을 보여주는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들은 결코 저질로 매도될 수 없는 일본 대중 문화가 보여주는 정수들이다. 요절한 가수 오자키 유다카가 노래한 청소년의 비애와 절망 또한 일본 대중 문화가 가지는 흔치 않은 얼굴이다.

 그러나, 오르데카의 말처럼 대중은 현대의 새로운 야만인들인지도 모른다. 대량 소비와 대량 정보라는 그 본질 속에서 생활양식과 가치는 평준화·획일화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속에서 살아가는 야만인으로서, 일본의 대중문화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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