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만 삼국지 “내년에 보자”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03.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주당 당권 경쟁 장기전 체제로…‘지구당 개편’싸고 세력 다툼 더 거세질 듯

민주당 당권 경쟁이 장기전 체제에 들어갔다. 여?야가 지방자치단체 4대 선거를 내년 6월27일 한꺼번에 치르기로  최종 합의함에 따라 민주개혁정치모임(개혁모임)과 비주류측이 전당대회 조기 개최 요구를 철회해 민주당 당권 주자들의 정면 승부는 1년 뒤로 미뤄지게 됐다.

 지난 2월7일 기자회견에서 올해 8월께 임시 전당대회를 열자고 주장한 김상현 고문은 5일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지방자치선거가 상당히 늦춰진 만큼 내년 2월께 정기 전당대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수정 제안했다. 지난 연말부터 전당대회 조기 개최를 주장해온 개혁모임도 내년1~2월께 정기 전당대회를 열자는 쪽으로 의견을 정리했다. 그동안 유보적 입장을 보여왔던 김원기 최고위원도 5일 기자회견에서 전당대회 조기 개최불가를 밝혔다. 이로써 민주당 내에서 당 지도체제 개편을 둘러싼 공식적인 논란은 일단 마무리됐다.

 그러나 그동안 전당대회 조기 개최를 놓고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민주당내 각 계파와 세력의 속마음이 모두 드러나버려 주도권을 잡기 위한 크고 작은 세력 다들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번 전당대회 조기 개최 논란 과정에서 이기택 대표 체제에 공식으로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김상현 고문과 김원기 최고위원이다. 김상현 고문은 오래 전부터 당권도전 의사를 밝혀왔으며, 김원기 최고위원은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다음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할 뜻을 굳혔다”라고 밝혔다. 지난 전당대회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대표를 지지했던 세력 중에서 김원기 최고위원과 개혁모임이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김대중 전 대표의 뜻에 따라 이기택 대표를 지지해왔던 범주류 세력의 균열을 뜻하기도 한다.

‘합의’뒤엔 범동교동계 제동이
 아무튼 민주당 당권 경쟁은 이기택 대표, 김상현 고문, 김원기 최고위원의 3파전으로 압축돼가는 양상이다. 지난 전당대회 때 당권에 도전한 정대철 고문과 개혁모임의 이부영 최고위원은 당권 경쟁에는 직접 뛰어들지 않고 당권 후보들과 연대해 당내 주도 세력이 되고 나아가 대권 후보에 도전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정대철 고문은 김상현 고문을, 이부영 최고위원은 김원기 최고위원을 일단 지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기택?김상현?김원기 세 경쟁자의 가장 큰 고민은 누구도 당내에 확고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역 의원만 40여 명을 거느리고 있는 범동교동 계파인 내외문제연구소(소장 이우정)에 비하면세 사람은 모두 당내 소수파이다 이번에 전당대회 조기 개최 문제가 없었던 일이 된 것도 표면적으로는 지방자치선거가 예상보다 늦춰진 탓이지만 사실은 범동교동계가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본래 이기택 대표측도 전당대회를 빨리 열어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대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자제 선거를 위해 필요하다면 전당대회를 앞당길 수도 있다’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그러다 내외문제연구소에서 조기 전당대회 불가 방침을 표명하자 주춤했다. 김상현 고문이나 개혁모임도 마찬가지이다. 내외문제연구소가 전당대회 조기 개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6월 실시를 명분 삼아 재빠르게 발을 뺀 것이다.

 내외문제연구소측도 고민이 없지 않다. 세력은 크지만 내세울 인물이 없다. 김대중 전대표의 뜻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당권 경쟁 소용돌이 속에서 조직원이 하나 둘 이탈할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대표측이나 김상현 고문, 김원기 최고위원을 견제하며 집안 단속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내외문제연구소에서 이중 계보를 정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은 당권 경쟁 주자들과 범동교동 세력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양상이다. 누가 이 균형을 깨뜨리고 선두로 내달을 수 있는가가 앞으로 민주당 당 권 경쟁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김원기 최고위원이 지 난 5일 기자회견에서 조직강화특위를 가동해 당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본래 민주당은 지난 전당대회가 끝난 뒤 3개월 내에 부실 지구당을 정리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런데 전당대회가 끝난 뒤 1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지구당 정비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연말 당 조직국에서 실시한 바에 따르면, 최소 13개~최대 30개의 지구당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사고 지구당 17개를 합치면 50개 가까운 지구당이 정비 대상이라는 얘기가 된다. 현역 의원이 지구당위원장으로 있는 지역구를 빼고 3분의 1 가량을 물갈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갈이 대상인 지구당위원장을 어떤 사람으로 바꾸느냐에 따라 민주당의 세력 판도는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 있다. 김최고위원이 조직 강화를 들고 나온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당위원장 누가 많이 내느냐가 변수 
 당내 조직 정비를 통한 세력 확대는 이대표?김고문?개혁모임 모두가 바라는 바이기 때문에 멀지 않아 민주당의 최대 현안이 될 것 같다. 민주당 내에서는 이대표가 오는11일 대표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당 개혁을 위한 획기적 방안을 내놓아 선수를 치고 나올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당내 분위기로 보나 사회 여론으로 보나 예전처럼 지구당위원장 자리를 나눠먹기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누가 좋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내세울 수 있느냐가 민주당 당권 경쟁 후보자들의 1차 수학능력 시험이 될 것이다. 이대표?김고문?김최고위원은 나름대로의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대표는 당의 얼굴로서 활약할 기간을 1년이나 더 벌었다. 박찬종 신정당 대표보다 지지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아온 이대표로서는 대중 정치가로서 이미지를 높일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셈이다. 대표라는 자리를 활용해 사조직인 통일산하회조직을 강화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지난 1년간 지도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동시에‘어떤 야당 지도자보다 사고가 민주적’이라는 호평을 받고있다. 그러나 조직관리 능력 면에서는 경쟁자에 비해 떨어져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민주당 계파 중에서 가장 많이 부실 지구당위원장을 끌어안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사람 관리가 허술하다. 

 김상현 고문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기택대표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어제 욕하던 사람도 오늘 김상현과 밥을 한끼 먹으면 내일은 달라진다’고 할 정도로 사람을 끄는 힘이 대단하다. 그의 지지 세력은 전국에 실핏줄처럼 뻗어 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도 감옥에서 나오면 1주일 안에 승용차를 마련하고 한달 안에 50평이 넘는 사무실을 갖출 정도로 그의 지지 기반과 자금 동원 능력은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과거 김대중 노선에서 이탈했던 ‘전과’가 있다. 그 때문에 동교동계 처지에서 본다면 여전히 그는 ‘믿지못할 사람’이다. 그는 동교동계의 불신을 씻기 힘들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력 우승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김원기 최고위원은 야당통합의 산파였다. 그 때문에 그에게는‘협상의 귀재’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각 계파를 줄로 세운다면 그의 뒤에 늘어선 줄이 가장 짧겠지만, 투표를 하면 상황은 반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란 얘기를 민주당 내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다. 계파를 초월해 그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다는 얘기다 언행이 신중해 좀처럼 남에게 원망을 사는 일이 없다. 지난 대선 때 재야 세력과 정책연합을 주도한 사실을 놓고 이 대표측에서는‘대선을 망친 사람’이라고 비판하지만, 그에게는 재야와 협상할 때 맺은 인연과 경험이 큰 재산이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당권을 맡으면 “아니 저런 사람까지, 할 정도로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다"라고 자신한다. 그러나 그는 과거 민한당에 참여하는 둥 정치 경력이 상대적으로 선명하지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그리고 너무나 신중해‘돌다리를 두들겨 보고도 안 건너갈 사람’이란 혹평도 듣는다.

 남은 1년 동안 세 사람은 각자의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그림 좋게 싸우는 것이다. 세 사람이 쓰는 삼국지에 권모술수만 난무한다면 아무도 읽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