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사전에 ‘평화시대’란 없다
  • 워싱턴.김승웅 특파원 ()
  • 승인 1994.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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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통신

그는 4억원짜리 저택에서 살았다. 서울에서야 ‘뭘, 그쯤 가지고'소리가 나올 법하지만, 이곳 워싱턴 D.C. 일대에서 54만달러(약 4억3천만원)짜리 집에 산다는 것은 돈 많은 유태인이나 할 일이지 미연방 공무원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는 또 4만달러가 넘는 영국제 승용차 재규어와 2만달러짜리 일제 혼다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보통 시민이 타는 승용차는 2만달러(약 1천6백만원) 미만이다. 우리로 치면 중앙청 과장급 공무원 신분에 벤츠보다 더 비싸다는 재규어와 쏘나타 한 대씩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그렇게 9년을 살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중견 간부 앨드리히 에임즈(52)의 이같은 호화판 생활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은 없었다. 그의 직함은 대소(대러시아)간첩작전 과장. 지금은 한직인 마약수색과장으로 좌천돼 있다. 마침내 이중간첩 혐의로 체포됐지만, 물 좋고 서슬 퍼렇던 지난 4~5년 동안 'CIA  중의 CIA'라는 대소간첩작전 과장의 초호화판 행각을 동료 직원들이 수상쩍게 여기지 않았다는 대목은 클린턴 행정부가 지금 가장 가슴 아파하는 치부다. 

 그가 이중간첩질을 해서 러시아로부터 받았다는 1백50만달러(약12억원)는 2일 알렉산드리아 법정에서 열린 예비 심문에서 하루만에 거의 2배에 가까운 2백70만달러로 불어났다. 이 액수면, 9년 동안에 해마다 3억원씩을 모스크바로부터 받아 챙긴 셈이 된다. 중앙정보국내 같은 직급 직원의 급료보다 10배가 많은 돈이다.


아내틀 잘못 두면 첩자가 된다?
 미국 정가의 관심은 지금 두 가지 의문에 쏠려 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중간첩질을 하게 했나, 그리고 미?러시아 간에 요즘 같은 평화 시대에도 이토록 거금을 들인 첩보 활동이 상존할 수 있는 가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 의문에 대해 정작 미국 신문과 텔레비전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대신 주간지쪽이 무척 분주하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주인공 에임즈가 이중간첩 노릇을 한 원인을 그의 땟국 묻은 과거에다 맞추고 있다.
 에임즈는 85년 8월 첫 번째 부인 낸시와 이혼했다 그가 맥시코시티에서 소련을 상대로 한 스파이 총책을 맡고 있던 때이다. 그로부터 9일 후 그는 지금의 부인 로사리오(41)한테 처녀 장가를 들었다. 로사리오는 당시 맥시코시티 소재 콜롬비아대사관의 문정관으로 근무하는 여성 외교관으로, 출중한 용모와 화술로 그 도시의 사교계와 외교가를 주름잡던 인물이었다. 콜롬비아 최대 명문가의 딸인 그와의 결합을 통해 에임즈는 남미 여러 나라에 산재한소련 및 동유럽권 공관에 접근하기가 쉬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도 대러시아 청보 활동에 CIA 예산 40% 쏟아
 이를 발판으로 그는 곧 이어 SE 책임자로 승진해 귀국했다. SE란 중앙정보국 용어로 소련과 동유럽 (Soviet?East European)을 뜻한다. 이 시점은 또한 그가 워싱턴 D.C.에 있는 소련대사관측과 비밀 접촉을 시작하고, 거금이 그의 은행 계좌에 입금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로사리오의 행패가 나타난다. 그는 결혼한 직후부터 엄청난 돈과 보석을 요구해 남편을 주눅들게 했다. 전처한테 위자료를 줘야 하는 데다 새 아내의 앙탈마저 겹쳐 옴짝달싹 못하는 에임즈에게 크렘린이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문제는, 로사리오가 남편 에임즈를 옭아매기 위해 고용된 소련 첩자가 아니겠느냐는 데로까지 확대되고있으나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연방수사국(FBI) 이에임즈 부부의 집안에 몰래장치해둔 도청기에 아내 로사리오가 남편에게 "더 많은 돈 !"을 습관처럼 되뇌었으며, 남편에게 말끝마다 '천치' 또는 '똥구멍(asshole)'이라고 욕을 퍼부은 사실이 녹음돼 있다. 
 이번 사건은, 미국과 러시아가 누리는 지금의 화목한 관계도 껍질을 벗겨 보면 가식에 불과한 것임을 웅변한다. 

 미국 쪽도 러시아에 대한 첩보 활동만큼은 아직 활발하다. 미국중앙정보국의 1년 예산은 3백억달러(24조원)로 우리나라 전체 예산의 3분의 2에 달하는 거액이다. 이 중 65%가 소련에 대한 첩보수집과 대간첩 작전에 쓰여 왔다. 러시아가 들어선 이후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도 예산의 40%가 모스크바를 겨냥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나라는 오랜 냉전을 통해 무척 지쳐 있는 상태다. 그 점에서는 국가나 개인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터진 것이 이번 이중간칩 사건이 아닌가 싶다. "삶이 따분하고 지쳐 있는 사람에게 스파이 활동은 최고?최대 활력소"라고 갈파한 보이 스카우트 창시자 베이든 파월 경의 역설은 정곡을 찌른 명언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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