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동북아 질서 재편 ‘터잡기’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4.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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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 일 · 중 방문외교로 주도권 노려…통일기반 구축 등에 초점

지난해 연말과 올해 2월초 중국 정부로부터 북한 핵의 실상과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가 한국 정부에 전해졌다. 중국 정부의 판단으로는 ‘북한이 앞으로 2~3년 안에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도 상황도 되지 못한다’는 내용과,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는 조처를 취할 경우,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간 사찰을 둘러싼 위기 국면은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연말께 주중 한국대사관을 통해 전달된 이 메시지는, 2월초 잠시 귀국한 황병태 주중대사를 통해 다시 한국 정부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의 메시지는 북한 핵에 대해 강경론으로 기울어져 있던 한국 정부를 온건론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내 강경 여론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설득하는 근거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내부 소식에 정통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당시 이 메시지를 통해 한국과 미국 정부의 입장을 온건론으로 전환시키고, 북한과 막후 접촉을 통해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수용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이 소식통은 “지난 2월15일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수락하기까지에는 한국 · 미국 · 북한 간의 교섭 이외에도 중국의 막후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라고 강조했다.

‘4강 균형 외교’첫 무대 될 듯
 올해 초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 방문에 이어 중국 방문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이용해 1년동안 답보를 거듭하고 있는 핵문제와 남북관계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정부내 소식에 밝은 한 소식통은 “올해 국정 최고 목표를 국제경쟁력 회복에 두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핵문제로 인한 남북관계의 답보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될 경우, 경제 희생이라는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북한 핵 문제가, 북한이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결단한 이후 어쨌건 해결을 위한 과정에 접어들게 되면서, 현재 김대통령의 방일 · 방중 외교의 목표도 더 거시적인 방향으로 조정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즉 취임 초기로 조정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즉 취임 초기 대통령이 새 정부의 외교정책 기조라고 밝힌 ‘4강 균형 외교’와 ‘통일 시대에 대비한 외교’의 첫 무대로 이번 한 · 중, 한 · 일 정상 회담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정상 회담의 의제가 좀더 폭넓은 방향으로 조정되고 있다는 점은 정부 관계자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외무부 고위 당국자는 “이번 정상 회담의 주된 목표는 그동안 동북아 정세의 흐름에 대해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던 김영삼 대통령이 이 지역의 질서 재편성 과정에 뛰어들어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동북아 질서 재편성 과정에서 남북관계의 진전 및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의 통일방향 등에 대해 중국 및 일본 정상과 교감해두는 일이 현재 우리에게 닥친 가장 긴박한 현안이다”라고 덧붙였다. 현안으로 대두됐던 북한 핵 문제는 “어차피 해결 과정에 접어든 만큼 외무장관급 실무 회담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새 정부의 신외교정책 중 동북아 정책의 핵심으로 제시한 ‘4강 균형 외교’라는 개념은, 그동안 냉전체제에서 이루어졌던 미 · 일 편중 외교에서 벗어나,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 4강과의 균형 관계를 확보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4강 간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매개하는 역할까지 담당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바탕에 깔고 있다. 민족통일연구원 신상진 박사는 “현재 동북아에서 한국은 질서 형성 과정을 주도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위치이다”라고 지적했다.

 탈냉전 이후 한반도 주변정세는 세력 균형의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퇴조로 상징된다. 이미 러시아는 국내 문제로 인해 4강 대열에서 상징된다. 이미 러시아는 국내 문제로 인해 4강 대열에서 탈락했고, 미국도 일방적인 주도력을 상실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지역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과 일본이 가세해 미 · 중 · 일 3강 체제라는 새로운 세력 균형 체제가 형성돼 있으나, 서로에 대한 견제 때문에 어느 한쪽도 신질서 형성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패권을 추구한다는 의심을 덜 받고 있는 한국이 새로운 질서 형성의 매개자 및 주도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분단 상황 관리’에도 큰 의의
 4강 균형 외교라는 관점에서 특히 이번 김영삼 대통령의 순방외교 중 단연 무게가 실리는 것이 방중 외교이다. 일본 방문의 경우 지난해 호소카와 총리의 방한에 대한 답방이라는 형식이 강한 데 비해, 중국 방문은 그동안 정치 · 군사적으로 북한에 편향돼 있던 중국의 한반도 정책을 한국 쪽으로 돌리기 위한 포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방중 외교의 최대 초점은 그동안 경제 관계에 국한돼 있던 한 · 중 관계를 정치 · 군사적 관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중국과의 군사 안보 관계는 지난해 10월 한승주 외무부장관이 중국 방문 당시 양국 대사관에 무관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첫걸음을 내디딘 상황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의 군사 안보 협력이 어느 수준까지 끌어올려질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밖에 중국 · 일본 정상과의 대화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현재 각각 긴장의 불씨를 안고 있는 중 · 미 관계, 미 · 일 관계, 중 · 일 관계의 쟁점들을 중재하는 역할도 가능할 것으로 점쳐진다. 또한 현재 동북아 질서 재편성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다자안보기구’ 태동을 위한 논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도 기대된다.

 신외교정책 중 남북한의 미래와 관련해 중요한 개념이 ‘통일 시대를 준비하는 외교’이다. 지난해 5월30일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통일 외교는 ‘분단 상황을 관리하는 외교’ ‘통일을 준비하는 외교’ ‘통일 이후를 대비하는 외교’라고 단계적으로 구분해 설명한 바 있다. 이 중 남북 간의 적대 관계를 협조 관계로 전환하는 문제는 분단 상황을 평화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요체가 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남북의 관계 개선뿐 아니라, 중국 · 일본 · 미국과 협력해 북한 체제의 변화와 개방을 끌어내는 것이 전제 조건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일본 · 중국 방문은 분단 상황 관리라는 측면에서도 그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 일본과는 핵문제 해결 이후 점쳐지는 북한과 일본 간의 수교 협상에 대해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전달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 현재 주변 4강 중 북한에 대해 유일하게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남북관계 진전 및 북한 체제의 변화와 개방, 한반도 통일의 방향에 대해 중국 지도부와 교감을 이뤄둘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민주당의 조순승 의원은 “강대국 간의 역학 관계가 세력 균형 체제로 정립될 경우 강대국은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는 것이 국제 정치의  일반 법칙이다. 주변 강대국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현상 유지 세력으로 고착되기 전에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의 미래 및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 현안으로 다가오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경제협력 획기적 변화 계기 마련
 정치 · 외교적 현안 외에도 김대통령의 일본 · 중국 방문은, 우루과이 라운드 체제라는 새로운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양국간 경제관계를 기존의 통상 및 무역 관계 차원에서 산업간 협력 체제 구축이라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는 지난해 호소카와 총리가 방한했을 때 양국간 경제협력을 총괄시키기 위해 창설키로 합의한 ‘한 · 일 신경제협력대화기구’의 공식 출범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신경제협력대화기구를 통해 양국은 무역관계 · 기술협력 · 산업간 협력 · 환경문제 등 한·일 간의 경제 현안을 포괄하여 다루게 된다.

 한국과 중국은 이번 정상 회담을 계기로 국가간 경제협력 과정에서 일찍이 보기 어려웠던 획기적인 실험을 하게 될 것이다. 양국이 공통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산업 부문에서, 제품의 공동생산 · 공동판매를 위한 방안이 논의되기 때문이다. 한 · 중 양국은 이를 위해 이번 정상 회담 때 ‘산업협력회의’라는 기구를 띄우게 될 예정인데, 이 기구는 앞으로 자동차 · 전자교환기(TDX) · 중형항공기의 공동생산 문제와 고화질 텔레비전(HDTV) · 원자력 분야 등에서의 협력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적어도 반 이상은 이번 회담에서 합의에 이를 전망인데, 만약 이런 방식의 협력이 가능해질 경우 이는 “몇 대에 걸쳐 먹고 사는 것이 가능한 획기적인 협력 방안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 양국 간의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문제들로 한 · 일 간에는 사할린 한국인, 군대 위안부, 문화재 반환, 무역불균형 시정 문제가 있고, 한 · 중 간에는 이중과세 방지협정, 문화교류 문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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