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의 피서지 구상 ‘수습·독자노선’ 이중주
  • 김재일 정치부차장 제주·서명숙 기자 ()
  • 승인 1991.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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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각기’거친 후 대국민 호소 나설 듯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간의 신뢰는 깨졌는가, 위기감을 느낀 김대표는 어떤 승부수를 던질 것인가. 김대표의 제주도 휴가를 전후해 돌출된 민자당의 갈등 이후 정가의 관심은 여기에 모아지고 있다.

 노대통령과 김대표, 김대표와 민정·공화계의 ‘예비된 갈등’이 표면상 돌출된 것은 김대표가 지난달 11일 노대통령과의 주례 회동에서 “총선 전 대통령 후보 조기 가시화”를 강력히 요구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지금은 정치일정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라며 쐐기를 박았다. 후보 공론화 자체가 곧바로 통치권의 누수현상을 가속화 시킨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김대표는 청와대측의 ‘의도적인 애매모호성’이 통치권 누수방지 차원이 아닌 ‘자신을 물먹이려는 작전’일 가능성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광역의회 선거 후 정치적 위상이 공고해졌음을 확신하며 대세론을 앞세워 예측 가능한 정치일정을 밀고나가려  했던 김대표로선 일대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노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총재의 청와대 회동, 박태준 최고위원이 주재한 민정계 8인 중진의원의 골프회동, 김종필 최고위원과 민정계 의원들의 골프회동 등 잇따른 정치권의 예사롭지 않은 동향은 김대표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던 김대표측은 노대통령이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 김종필 최고위원, 박태준 최고위원 등과 만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그런 일련의 움직임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죄어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김대표가 제주로 휴가를 떠나기 전날 터져나온 최영철 대통령특별보좌관의 이른바 ‘내각제 발언’이었다. 26일 최특보는 경제인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내각제 개헌 가능성’ ‘대통령후보의 야당 경선식 결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물론 이 발언은 즉각 최특보에 의해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됐다. 그러나 정가에서는 ‘완전 자유경선에서는 이길 가능성이 없으니 내각제를 받으라’는 김대표에 대한 압력용임과 동시에, 정치자금이 재계에서 김대표 진영에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된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며칠 후 김종필 최고위원은 “대통령의 복안은 분명하다” “때가 되면 성능에 관계없이 기관차는 교체될 수 있으며, 남북문제와 국내 정치문제는 병행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최고위원의 말은 ‘김대표는 대권후보에서 이미 제쳐졌다’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것이었다. 민정·공화계 중진의원들과 ‘새 정치 모임’ 멤버들 역시 노대통령의 의중에 대해 ‘김영삼 대표는 아니다’라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한 것 같다.

 감이 뛰어난 정치인인 김대표는 이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경선불사의 의사표명으로 치고나온 것이다. 이러한 자유경선 의사표명과 더불어 그의 측근들은 ‘청와대측의 3중플레이’등 원색적이라고 할 만한 불평을 털어놓으며 청와대측에 대한 불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계파갈등이 예상보다 더 크게 증폭되자 30일 김윤환 사무총장이 ‘중재역’을 자임, 급거 제주로 내려가 양쪽을 설득하는 해프닝까지 벌임으로써 제주는 졸지에 중앙정치 대리전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제주바다를 사이에 둔 1주일간의 공방전은 김대표의 제주휴가를 ‘제2의 마산행’으로 비쳐지게 만들었다. 자연 정가의 관심은 ‘폭발적’인 정치인인 김대표가 기습적으로 내놓을지도 모르는 제주도 구상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김윤환 사무총장의 중재방문 이후 김대표는 모든 정치적 일정과 방문을 중단한 채, 자신의 제주구상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정치권의 관심을 애써 외면하며 당초 계획대로 가족과의 피서를 즐겼다.

 제주행 1주일째인 8월2일 10시.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포구에서 통통선을 타고 출발한 김대표 가족과 측근들은 비양도 부근에서 2시간 가량 바다낚시를 즐겼다. 김대표는 동행한 취재진들에게 “이제 정치 이야기는 그만 하자. 낚시 이야기나 하자”며 말문을 돌렸다. 김대표에게만 유독 고기가 많이 걸리자, 한 측근은 “고기들도 김대표를 알아본다”며 다분히 정치색 짙은 화제를 던지기도 했다. 김대표는 얼른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렸다. 정치화제를 부담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래 전에 예정됐던 휴가인데도 때마침 정치공방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마치 제2의 마산행처럼 언론에 비쳐진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있다.

 제주체류 마지막날인 4일 11시. 김대표는 일요예배를 보기 위해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강정교회(서귀포시 강정동)를 찾았다. 이날 예배에서 예수교장로회 ‘장로’로서 기도를 인도한 김대표는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담대함과 용기를 잃지 않고 이 시대의 정의를 실천하는 용기를 주시옵소서”라는 요지의 기도를 했다.

 이날 오후 3시30분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김대표는 현지 기자들과 간담형식의 대화에서 제주도민들의 최대 관심사인 제주도 개발 관련 특별조치법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정가의 이목을 집중시켜온 소위 제주구상의 일단을 유추해봄직한 정치성 질문에는 끝내 함구했다. 유력인사와의 연쇄접촉으로 요란했던 휴가 전반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김대표는 과연 ‘피서지에서 생긴 일’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또 피서지에서 정리한 구상은 어떤 그림인가. 김대표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는 한, 그리고 흔히 정치인들의 구상이 시간이 지나야 그 베일을 벗는 속성을 감안할 때 당장 밝혀지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행적을 통해 그 일단을 짐작해볼 수는 있다.

 김대표의 향후 행보는 한마디로 ‘일면 수습, 일면 독자노선’의 형태를 띠게 될 듯하다. 당초 최영철 특보의 발언을 시발로 김종필 최고위원의 ‘기차 종착지’발언 등이 잇따를 때만 해도, 민주계의 분위기는 “지금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로 매우 격앙돼 있었다. 민주계 소장파들이 제주를 방문, 김대표에게 강력 대응을 건의할 움직임까지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김대표측은 주말 노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을 계기로 대권후보 결정시기와 방식을 둘러싼 민자당의 내분을 일단 묻어 둘 것으로 보인다. 최특보의 발언을 빌미로 일단 민주계의 의사 표시는 충분히 해두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 김대표 자신이 대권구도를 놓고 계속 왈가왈부 하는 모습은 일반 국민들의 정서에 반하는 것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이 목전에 와 있는 시점에서 대권후보 결정을 둘러싼 갈등의 지속은 자칫 국민의 눈에 대권에의 지나친 집착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계의 한 중진의원은 “언젠가는 노출될 갈등임에도 그동안 계기가 없어 드러내지 못하다가 최특보의 발언이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이라며 “이젠 할 말을 다한 만큼 주례회동을 계기로 수습쪽으로 가닥이 잡힐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일단 수습’과 함께 김대표의 ‘독자노선 강화’양상도 상당히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마산행과 박철언 장관 퇴장 이후 김대표는 노태통령의 ‘제2인자’로서 운신하는 한편, 주례회동 등으로 노대통령과 신뢰관계 구축에 가장 큰 비중을 두어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달 11일 노대통령과의 주례회동에서 “선후보결정”을 강력히 건의한 후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온 민정·공화계의 공세는 김대표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민주계의 ‘자유경선 불사’ 발언이 터져나온 것도 노대통령에게 더 이상 기댈 수만은 없는 이상, 정면돌파도 불사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김대표는 자유경선 문제를 둘러싸고 “반드시 표대결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한 민주계 한 당무위원의 말이 보도되자 “쓸데없는 말을 했다. 왜 변명하고, 우회하고 그러는가. 당당하게 나아가야지”라며 못마땅해 했다는 후문이다.

 김대표의 ‘홀로서기’는 “앞으론 국민과 역사를 의식한 정치를 하겠다”는 제주에서의 언급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국민과 역사”의 반대편이 최고 통치권자이자 대권후보 결정권자인 노대통령을 뜻하는지는 물론 단언할 수 없지만, 광역선거 후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당내 대세 굳히기에서 대국민 호소와 명분축적 쪽으로 전략을 바꾼 것만은 분명하다. 김대표 주변에서는 “국민과 역사···”발언을 노대통령과의 어정쩡한 신뢰관계를 정리하겠다는 의사표시로 해석하고 있다. 김대표의 한 측근은 “두고보라. 앞으로는 대통령의 뜻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대국민 발언을 독자적으로 많이 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어쨌든 제주도에서 일었던 회오리 바람은 주말의 노대통령·김대표의 청와대 정례회동을 고비로 일단 잠잠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태풍을 예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총선시기와 대통령후보 결정의 선후관계는 노대통령과 김대표 어느 한쪽도 양보할 수 없는 민자당의 최대 현안이다. 김대표의 요구대로 총선 이전에 대통령후보가 결정될 경우, 노대통령의 국정운영 재량권은 당연히 제한받을 수밖에 없고, 총선 후의 정국을 주도하기 힘들 정도로 통치권 누수현상이 가속화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 김대표로서는 총선 후 후보 결정일 경우 그때 노대통령이 자신을 후보로 낙점하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고스란히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고 자신의 무기들이 무력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대표로선 자유경선이든 뭐든 다 수용하더라도 총선 전 대통령 후보 결정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이는 김대표가 총선 후의 가능성에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 만큼 노대통령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김대표는 부득불 ‘총선전 대통령후보 결정’을 위해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현안을 놓고 다시 갈등이 재연될 시기는 총선시기에 따라 유동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잠복된 바람이 언젠가는 무서운 기세로 다시 휘몰아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때는 여권뿐만 아니라 정치권 전체의 지각변동을 부를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사안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소위 ‘구국의 결단’에서 비롯 됐다는 3당합당은 대권싸움의 소모전으로 이어지며 그 명분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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