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통치로 돌아가는가
  • 박권상 (편집고문) ()
  • 승인 199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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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치가’들의 잔인한 정권 쟁탈전은 결국 모두 패배자가 되는 불행한 사태를 낳을 것이다.

 힘의 통치가 깃발을 올리려는 것일까. 以力服人이라 할까.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그런 패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려는 것일까. 정권의 계속을 위하여서는 수단방법을 안가리는 힘의 철학, 약육강식하는 ‘밀림의 법칙’이 전개될 것인가. 이성과 법치주의와 의회민주주의는 설 땅을 잃고 끝내 감정과 이기주의가 승리할 것인가. 실로 한심스럽다. 정말 걱정스럽다. 정권이 무엇이길래 인간의 마음을 이토록 탁하게 만들고 인간의 행동을 이토록 험하게 만드는 것일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아무래도 이성과 양식에 입각한 의회주의는 가고 힘과 힘이 부딪치는 군사독재 시대의 수라장이 벌어질 것만 같다. 그 후유증은 극도의 정치불신으로 이어져 국민다수의 입에서 국회무용론이 나올는지도 모른다. 이 나라 정치주역들은 국민적 정치혐오가 무엇을 가져올지, 우매한 실력대결이 얼마나 가동할 사태를 가져올지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오늘의 위기국면에 대한 책임의 일단을 모면할 길이 없다.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난 지 4개월이 지났고 임기가 시작된 지 두달이 넘었는데도 아직껏 국회가 제 몫을 못하고 혼미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현실에는 여야 할 것 없이 누구나 응분의 책임이 있다.

 

통치권에도 지자제 ‘장’선거 거부권 없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한 근본 원인은 정부 여당이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유린한 데에 있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 안가리겠다는, 심지어 엄연한 실정법을 깔아뭉개도 좋다는 그 사고방식에 화근이 있는 것이다.

 지난 1월 노태우 대통령이 돌연 지방자치 단체장선거를 무기연기한다고 선언한 것은 무어라 변명하든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입법부와 국민을 모멸한 것이다. 대통령에게는 ‘통치권’이라는 이름으로라도 법이 규정한 지자제 ‘장’선거를 거부할 권한이 없다. 더욱이 여야가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대통령이 아무 이의없이 서명 · 공포한 법인데도 “1년에 네차례 선거를 할 수 없다”는 경제적 이유를 들어 대통령 말 한마디로 사문화해 버렸다.

 그 이유가 정말 타당했다면 당연히 즉각 국회를 소집하여 심의 · 개정했어야 한다. 정부 여당은 원내에 70% 이상의 의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적법절차를 이유없이 밟지 않았다. 1년에 네차례나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주장은 얼마 안가 허구임이 드러났다. 6월에 열린 새 국회가 야당 거부로 기능을 발휘못하자 민자당은 93년중에 지자제 ‘장’선거를 실시할 수 있다는 데로 궤도를 수정한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12월 중순에 실시되는데 곧 이어 93년중에 두차례의 지자제 ‘장’선거가 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러면서도 ‘장’선거의 연내실시만은 절대로 안되겠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함축하는가, 네차례 선거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면, 대통령선거와 특별시장, 도지사 및 구청장, 시장, 군수의 동시선거야 말로 정말 올바른 대안인데, 왜 한사코 못하겠다고 할까. 93년에 가능한 선거가 왜 92년에는 절대불가능하단 말일까.

 왜 기초와 광역 등 두가지 지자제 ‘장’선거 가운데 그중 하나만이라도 대통령선거와 동시에 실시하자는 타협안조차 거론이 안되는 것일까.

 

힘의 통치는 파멸 부른다

 민자당은 일방적으로 단독국회를 열었다. 수와 힘으로 지자제법을 고쳐 정부의 제안대로 ‘장’선거를 95년 이후로 연기할 계획임이 분명하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안하겠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딱한 일이다. 12월 대통령선거만은 야당 주장대로‘행정선거’로써 이기겠다는 계산일까. 이 점, 정부 여당은 시원스런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야당이 국회를 장기간 거부함으로써 국회에서 떳떳하게 시비를 가리고 잘잘못을 판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여당에 ‘날치기‘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당은 다수의 힘을 믿고 무리수를 쓰기로 결심한 것 같다. 이제 얼마 안가 국회는 야당의 실력 저지와 여당의 날치기로 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리는 무리를 낳고 다수의 횡포는 소수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다. 만성적 위기 속에서 대통령선거가 평화롭고 공정하게 실시될 수 있을까. 정부 여당은 날치기로 지자제 문제를 봉합하고 다시 무리수를 써서 이른바 ’정권의 재창출‘에 일로 매진할 것이다. 기왕에 먹은 욕, 우선 정권부터 다시 잡아놓고 보자는 힘의 통치가 벌어지고 야당은 극한 투쟁으로 맞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질 것이다.

 암울하고 잔인한 정권 쟁탈전이 될 것이다 .살벌한 선거전이 ‘문민정치가’들 사이에 벌어져, 누가 이겨도 결국은 모두가 패자가 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운명을 위해서도 정치주역들은 냉철한 이성으로 돌아가 법치주의의 테두리안에서 최악의 사태를 예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힘의 통치는 안된다. 그것은 파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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