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들꽃들의 천국 민통선 북방 ‘용늪’
  • 대암산 · 여운연 기획특집부 차장 사진 · 김서정 ( ()
  • 승인 1991.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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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산 고층습원, 금강초롱 등 지천을 피어 비무장지대 가칠봉에선 에델바이스 대군락 발견

 30°C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도 서늘한 가을을 느끼게 하는 곳. 남한 유일의 고충습원지 강원도 이네군 서화면, 민통선 북방에 위치한 대암산(해발 1천3백16m) 용늪. 지난 1일 한국 야생화연구소(소장 金黍正) 학술조사팀과 함께 비무장지대 인근지역의 들꽃 분포를 알아보기 위해 찾았을 때 이곳을 기온은 15°C. 태백산맥 준령의 한 봉우리인 대암산 해발 1천2백80m 지점 넓은 평원의 용늪은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자욱한 우무에 가려 있더니 잠시 안개가 걷히면서 진초록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대암산 용늪의 넓이는 남북길이 2백75m, 동서 2백10m의 타원형을 총 3만1천5백m². 대형 분지를 산자락이 감싸안듯 둘러싸고 있고, 가운데엔 2개의 작은 연못이 있어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승천을 앞둔 용이 있던 곳’이라 하여 ‘용늪’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 고층습원 지역에는 원래 큰 용늪과 작은 용늪이 있어 양 늪속으로 거미줄처럼 물이 흐르면서 주위를 따라 수많은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용늪은 주변의 토사가 흘러들어 오래 전 원형이 상실됐고, 큰 용늪만이 스케이트장 공사로 파괴된 흔적은 남아 있으나 뒤늦게(89년12월) 자여환경 보존지역으로 지정돼 그런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은 스스로 조절할 뿐 파괴라는 것을 모르는데, 인간의 발길이 조금만 닿아도 허물어지고 더렵혀지게 마련이다.

 전후 40년간 민간인의 간섭을 덜 받으며 비교적 원형이 보존돼 있는 편이다. 본래 호수에서 육지로 전환하는 중간단계라고 할 수 있는 늪지는 각종 물질이 변이현상을 보이고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여 생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중에서 고층습원은 한랭하고 습기가 많은 지역에 생성된다. 저온 · 산성 수질로 인해 박테리아 등 미생물의 분해활동이 거의 없어 식물의 유체가 썩지 않은 채  적갈색의 퇴적물(이탄)이 쌓여 형성된 곳을 말한다. 고층습원은 특히 오랜 세월 지층처럼 쌓인 이탄층 속의 꽃가루 분석으로 어느 시대 어떤 식물이 우세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으며, 이탄층 내에 생태 지형 환경 등 자연의 연대적 흐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으로는 ‘자연변천의 역사기록장’으로 매우 귀중한 곳이기도 하다.

 대암산은 한반도에 등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는 태백산맥에서 북서방향에 형성된 고산이어서 이곳의 기후는 주변 지형에 의해 크게 좌우되며, 하루에도 조석변이로 일기가 변화무쌍하다. 인제 기상관측소에 따르면 고층습원의 연평균 기온은 4.8°C. 7월의 평균기운이 17°C, 8월 평균15.6°C로 기껏 올라가야 18.7°C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겨울엔 영화의 기온이 5개월이나 계속되는 고랭지다. 안개가 끼는 일수는 인근 인제지방의 경우 연간 5일인데 비해 대암산은 1백70여일에 이르러, 이곳에 와도 운이 썩 좋아야 청명한 모습의 용늪을 바라볼 수가 있다. 따라서 습원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 앞끝에는 연중 계속되는 안개에 의해 생성된 물방일이 항상 맺혀 있다. 가장 더운 계절의 평균기온이 16°C 이하이며 연중 내내 안개로 덮여 있다는 점이 바로 대암산에 고층습원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게 한 것이다.

 대암산 용늪이 한층 관심을 끄는 요소는 습원 주위와 동쪽 대암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능선길을 따라 희귀한 야생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데 있다. 지난 66년 한국자연보존연구회가 미국의 스미소니언연구소와 공동으로 처음 실시한 ‘비무장지대 인접지역 종합학술조사’이래 현재까지 채집된 식물은 총2백여종.

남북의 식물이 만나는 지점
 고려대 이은복 교수에 따르면 이 일대는 북쪽 계통의 식물과 남쪽 계통의 식물이 만나는 지점으로 특히 대암산 용늪은 북방계 식물이 많이 내려와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김태정 한국야생화연구소 소장도 금강산과 백두산 고산지대에서 피는 야생화 종류가 휴전선 이남에도 유일하게 확인되는 곳이 대암산과 가칠봉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지역 일대에 즐비한 들꽃들은 식물학자들에겐 더할 수 없이 ‘귀한 손님’들이라는 것이다.

 봄에 피는 금강봄맞이 금강애기둥글레 만주송이풀, 7~8월에 아름다운 모습을 더러내는 꽃으로는 금강초롱, 금강산 비로봉에서 자란다는 비로용담, 꽃쥐손풀 참배암차즈기 등 귀한 여름들꽃들이 요즘 한창이다. 그중에서도 금강초롱은 우리나라 특산속식물로 세계적으로 진귀한 식물로 꼽힌다.

백두산서만 볼 수 있는 물이끼로 뒤덮여
 또한 고층습원이라는 혹독한 환경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습원 특유의 식물인 물이끼 끈끈이주걱 북통발 등 특이한 식물들이 용늪 한가운데서 독특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물이 질펀하게 괴어 있는 용늪 속에는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는 물이끼가 10㎝ 깊이로 습원 전체를 뒤덮고 있으며, 머리를 풀어 산발한 듯한 산사초(가는 오이풀 군집)가 광활한 습원지에서 소용돌이치듯 자라고 있다.

 용늪은 곳에 따라 깊이가 다르나 가장 깊은 곳은 1.5m까지 두터운 이탄층이 형성돼 있다. 늪바닥 전체가 마치 스펀지같아 발을 잘못 딛게 되면 그대로 늪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다. 이곳은 사람들 사이엔 용늪에 한번 빠지면 인근의 넓은 해안분지 ‘펀치 볼’로 나온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고층습원 지층에 잔뜩 쌓여 있는 꽃가루를 통해 추정된 이곳 생성연대는 4천~4천5백년 전쯤.

 용늪 주변에도 타지역에서 볼 수 없는 식물이 군락을 짓고 있다. 박새 곰취 꽃쥐손풀 냉초 산이이풀 천궁 바디나물 마타리 짚신나물 흰꼬리풀 매발톱꽃 나비나물 참취 진범 말나리 애기기린초 등 고산식밀이 철따라 어김없이 피고 진다. 이들 식물은 대게가 백두산 해발 1천~1천5백m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번 학술조사팀은 대암산에 이어 찾아간 산줄기는 휴전선 최전방 지역의 하나인 가칠봉. 가칠보은 남 · 북방 한계선이 불과 7백m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는 해발 1천2백42m의 최전방고지다. 대암산을 주봉으로 서북방향으로 도솔산 · 대우산 능선을 타고 가면 가칠봉으로 이어지는데 이곳 역시 능선 옆에 만개한 각종 고산식물들이 대자연의 화원처럼 화려한 여름을 장식하고 있다. 능선길 좌우에 활짝 핀 들꽃을 쫓아 수십종의 화분매개충들이 들끓고 있다. 현재가지 이곳에서 발견, 채집된 곤충은 57종. 특히 우리나라 중북부 이북 산간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산은줄표범나비 등 지역에서 네발나비류의 군무는 가히 장관이다.

 이번 탐사에서 조사팀이 가장 흥분한 것은 가칠봉 능선 일대에 밀집해 있는 왜솜다리(에델바이스) 대군락지가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왜솜다리는 극성스런 사람들의 무자비한 채취로 남아나지 못한 채 현재는 설악산 대청봉옆 귀때기청봉에서나 미미하게 잔존해 있는 형편.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왜솜다리가 바로 가칠봉을 오르내리는 길섶양켠에 분백색의 섬유질을 덮어쓴 채 무더기로 수줍은 모습을 드러내자 조사팀은 환성을 질렀다.

 기복과 굴곡이 험한 가칠봉 능선에도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갖가지 들꽃들이 아름다운 빛깔이 어우러진 채 정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얀 빛깔의 왜솜다리, 노란빛의 곰취, 진홍빛의 꽃쥐손풀, 주홍빛깔의 동자꽃, 흑자빛의 진범 등등.

 해마다 같은 시기에 찾아오는 이 놀라운 자연의 질서도 그나마 비무장디대 인근이니 사람들의 발길이 통제되어 간직되고 있는 셈이다. 이땅의 가녀린 풀 한포기, 작은 꽃 한 송이를 과연 누가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 인가. 탐사를 끝내고 비탈길을 내려오는 도중 시야에 들어오는 아스팔트 포장 불도저는 이들 귀한 들꽃을 언젠가는 짓밟을 것 같이 자못 위협적인 기세로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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