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36년 ‘예속화’ 46년
  • 최일남 (소설가·본지 칼럼니스트) ()
  • 승인 199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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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관계를 놓고 볼 때 8월은 한국민의 관절염 같은 고질이 집중적으로 재발하는 달이다. ‘정선 아라리’의 한 대목에 빗댄다면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의 계절인 것이다. 덜 치유된 류머티즘 비슷한 통증이 근육은 물론이요, 가슴속을 파고든다.

  하지만 그건 주로 노인들의 몫이다. 일기 불순을 귀신같이 알리는 관절염 자체가 노인성 질환이듯, 대도시의 일부 젊은층이나 십대 어린 것들은 ‘곤니치와 닛퐁’을 구가하고 있다. 신문 방송은 광복절을 전후하여 그런 풍조를 일제히 소개 비판한다.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일본 패션잡지의 그림을 본딴 머리모양과 옷차림으로 거리를 쏘다니는 모습이 일상화되었다. 집에서는 파라볼라 안테나로 일본 위성텔레비전을 관람하고, 술집에서는 가라오케 단계를 넘어 레이저디스크를 이용한 비디오케를 따라 노래를 부른다. 어른들은 먹성을 통해 일본의 깔끔한 음식문화를 재음미한다.

엔貨에 눌리고 샤미센에 취하는가
  도처에 깔린 우리 사회의 이런 일본화 현상은 서로서로의 각성과 한탄이나마 아직 유효한 단계이다. 해가 갈수록 불어나기만 하는 무역수지 적자는 그러나 한숨으로 끌 수 없고 걱정으로 해소될 일이 아닌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 대일 역조시정의 몸부림을 쳐보았댔자 일제 부품 없이는 기계를 돌릴 수조차 없는 형편인 데다, 그들이 공급을 제한하는 날이면 공장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니 말 다했다. 유통시장 개방과 더불어 진출 준비를 서두르는 量?회사가 터를 잡으면, 국산  소비재는 쪽을 못쓸 전망이다. 전자제품의 예를 들 경우, 도쿄의 아키하바라 상가를 서울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땀으로 쑨 죽을 뉘 입에 앵겼나.

  이번 주 《뉴스위크》는 ‘아메리카여 안녕’이라는 특집기사를 다뤘다. 동남아 각국에 걸친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이 미국을 압도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미국은 더 이상 이 지역의 경제대국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미국과 일본이 배턴터치를 하듯 가고 오는 어간에서, 이땅은 엔貨에 눌리고 샤미센(三味線)에 취하는가. 일제 36년을 신음하던 민족이, 그후 46년간 죽을둥살둥 일한 덕택에 착각이나마 한때는 그들을 따라잡을 기세더니 ‘웬걸’이 되고 말 추세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이치의 배경
  경제의 복잡한 구조야 헤아릴 능력이 없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풍물적 현상은 일본 것보다 항상 20년쯤 뒤에 나타나더라는 것이 내 주먹구구식 관찰이다. 이를테면 저들이 ‘가미카제 트럭’이라고 명명했던 공사판 덤프트럭 행렬의 무법성과, 우리의 그것이 표현하는 세월의 간격을 생각해보라. 섹스애니멀 소리를 들으며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을 누빈 양국 관광객들의 연월차 또한 비슷하다. 국회의사당의 몸싸움도 그만한 내력은 지닌 셈이다. 한쪽은 일찌감치 졸업했거늘, 한쪽은 그걸 뒤늦게 흉내내는 사정을 두고, 그러니까 그들의 20년 뒤를 따라가기 바쁘다는 계산법을 들이대려는 게 결코 아니다. 못된 것부터 배운 나머지 이제는 청소년들마저 아직 따끈따끈한, 1주일 전 도쿄패션을 서울서 두르고 다니는 현실을 아프게 직시할 따름이다.

  군사대국까지 노리는, 독일의 전후처리 방식에 비하면 몰인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일본의 한국 인식은, 늘 냉소적이다. 그 배경엔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 이치의 원용이 있다. 다름 아닌 한국정부의 순치된 대일감각이 그것이다. 태평양전쟁 유족들의 피맺힌 배상요구나 정신대의 사실규명 외침 등에 대해, 정부는 시종 침묵을 지킨다. 거들어 주기는커녕 방해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다. 메모 한장을 바탕으로 개시한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래, 차세대 친일파로 불러 마땅한 이들의 활갯짓이 현해탄을 넘나들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본방문 때, “한·일 양국은 피를 나눈 형제국”이라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던 전직고관을 상기하면 알조 아닌가.

  일본을 들먹이기 전에, 8월이 되면 나라 안에서의 점검을 더 서둘러야 할 까닭이 여기 있다. 가시적인 것 못지 않게 사고방식의 일제잔재 철거가 한결 긴요하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앙박물관 철거문제도 이런 각도에서 따져야 옳다. 그 ‘흉물’만 뜯어내면 민족정기가 사느냐 이거다. 집시법이나 보안법에 식민지시대의 遺構 같은 잔조물은 없는가. 보안관찰법을 왜 일제 때의 치안유지법과 사촌간으로 보는가를 아울러 살펴야 앞뒤가 맞는다.

  한글 티셔츠를 입은 학생에게, 반미운동의 일환으로 보인다는 이유를 들어 막은 학교가 있다. 탈춤반을 반체제운동의 씨앗으로 보고 펄쩍 뛰는 학교야 많다. 앞으로 일본 가다카나와 히라카나가 찍힌 티셔츠도 못 입게 막을까. 퍽 궁금하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슬프고 섭섭해 하실까. 케케묵은 발상이라고 해도 좋다. 이 8월에, 이 늙다리 작가는 민족정기의 먼지를 털고 새옷을 입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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