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의 권위를 생각한다
  • 박권상 (주필) ()
  • 승인 1990.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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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람들은 대체로 인생을 스포츠로 생각하는 것 같다. 세상만사를 스포츠정신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당연히 정치에도 반영되어 점잖은 의회민주주의로 연결되었다. 하원에서 벌어지는 토론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정치라는 이름의 스포츠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의회민주주의의 산실 영국하원은 모양새부터 對話型이다. 우리나라처럼 半圓型의 연설장이 아니다. 의장석을 중심으로 우측에 정부여당, 좌측에 야당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앉는다. 각각 다섯줄의 벤치에 앉는데 맨앞줄에는 마거릿 대처 총리 이하 장차관이 앉고, 지척에 있는 야당석에는 닐키녹 노동당 당수 이하 ‘재야내각’이 앉는다.

  맨앞줄의 대표선수들은 ‘말의 스포츠’에서 舌戰을 주고받고, 뒤의 네줄에 앉은 의원들은 응원단 격이다. 매일 오후 2시30분만 되면 반드시 45분간의 ‘질문시간’이 시작되어 여야간에 일문일답이 벌어진다. 질문은 짧고 답변도 간단하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원고를 써서 읽을 수 없다. 의장은 ‘말의 경기’를 진행하는 사회자인 동시에 잘잘못을 결정짓는 심판관이다. 그가 하는 일은 규칙을 엄수하고 공정하게 게임을 집행하는 것이다.

  폭력은 있을 수 없다. 만일 폭력에 호소하는 일이 있다면 그런 의원은 단호히 추방된다. 폭력사태는 결코 스포츠정신과 합치될 수 없으니까. 폭언도 금물이다. ‘말조심 규칙’이 엄하고 까다롭다. 의원들은 서로를 부르는데 반드시 ‘명예로운’이라는 존칭을 앞에 붙여야 하고 학자 출신이면 ‘학식 높은’, 군인 출신이라면 ‘용기있는’ 등을 붙인다. 야비한 말투, 인신공격은 타부. 역대 의장들이 만든 것이지만 거짓말쟁이·비겁자·바보·위선자·바리새인 등의 낱말을 의원에게 쓸 수 없다. 강아지·돼지·숫나귀·비둘기란 말도 써서는 안된다. ‘말의 스포츠’에 쓸 수 없는 말이 꽤나 많다.

여야 바뀌어도 의장은 유임되는 민주주의
  그래도, 때로는 말싸움이 심해져 소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흰 가발을 쓰고 검은 가운을 입은 의장이 근엄하게 “오더(질서) 오더”하면 조용해진다. 그래도 안되면 의장이 의장석에서 일어선다. 그러면 모두가 입을 다물어야 한다. 발언중인 총리도 야당 당수도, 야유중인 의원들도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 의장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모두 담임선생님 앞에서 꼼짝 못하는 국민학생들이다.

  이렇듯, 의장의 권위는 신성불가침이다. 어디서 그런 절대적 권위가 생겼을까. 역사적으로 의장은 입법부를 대표해서 王과 정부에 대항하는 ‘스피커’이기 때문이다. 입법부 득립의 상징이다. 그에게는 물리적 권한도 있다. 의장의 권위에 도전하면, 직권으로 구속해서 의사당 시계탑 지하실에 잠시 가둘 수도 있다. 그러나 의장의 진정한 권위는 공정성과 중립성에 있다.

  대개의 경우 의장은 다수파에서 나오지만 야당에서 나올 수도 있다. 의장은 여야 당수끼리 합의된, 여야가 더불어 존경하고 신임하는 원로정치인이다. 소신이나 행동이 너무 과격한 사람, 반대파에서 적극 기피하는 사람은 실격이다. 인격이 높고 덕망이 있고 공평무사한 인물이어야 한다.

  일단 의장이 되면 반드시 당적을 떠난다. 그대신 일단 의장이되면 죽거나 은퇴할 때까지 그 자리가 확보된다. 몰론 총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되어야 하고, 새 하원이 열리면 형식적으로나마 제선출되어야 하되, 떨어지는 법이 없다. 선거에서는 어떻게 당선되는가. 예의와 존경의 뜻으로 상대당에서 후보를 내세우지 않는다. “의장, 재선거에 나서다”라는 간단한 알림이 붙을 뿐이다.

국회의 ‘권위와 독립성’ 반드시 확보해야
  그는 선거연설을 하지 않는다. 의장의 권위에 어긋난다는 것. 온갖 잘못을 들추는 선거전에 말려든다면 입법부의 장으로서의 위엄이 어떻게 되겠는가. 어느 자연인의 문제가 아니라 ‘스피커’라는 자리 그 자체가 더럽혀질 염려가 있다. 그러나 의장이었다는 체모 때문에 선거유세도 못하는데 군소 입후보자들이 설치면 사정은 딱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관례에 따르면, 우선 그가 속했던 정당에서는 물론 상대당에서도 후보자를 내세우지 않으므로 군소후보가 나온들 큰 문제는 안된다.

  여야가 바뀌어도 의장이 유임되는 관례는 1921년 이래의 전통이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여름 총선거에서 처칠의 보수당이 노동당한테 대패하였다. 당시 보수당 출신의 브라운 의장은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애틀리 노동당 당수가 유임을 간청하여 1921년 이래의 전통이 뿌리를 내렸다.

 ‘스피커’의 권위가 그렇듯 지엄한 대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대단히 신중하고 공정하다. 그는 의장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6백50명의 하원의원 가운데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된다. 의장으로서 공식적인 손님은 접견하지만 사적으로 의원들과 어울려서는 안된다. 가령, 사사롭게 의원식당 같은 데서 동료의원들과 차를 마신다든가 밥을 먹을 수 없다. 엊그제까지의 당동지들과 희희낙락할 수 없다. 당파주의의 인상을 주어서는 ‘스피커’의 엄정한 이미지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대 국회의장은 대통령과 여당의 심부름꾼이었다. 국회를, 국민을 대변하는 ‘스피커’가 아니었다. 따라서 출발부터 존경받을 수 없었다. ‘민주화시대’의 의장은 달라져야겠는데, 국회를 여는 데 여야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일방적인 소집이니 정말 딱하다. 어차피 다수파에서 의장이 나올텐데, 사전에 여야 영수가 합의해서국회운영의 중립성을 보장하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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