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교육열에 큰 감명
  • 김승웅 편집국장대리 ()
  • 승인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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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로 관심 돌린 고르비 … 브레즈네프 신임 얻는 데 교포의 창의성 밑거름

고르비 돌풍이 한반도쪽으로 몰아닥치고 있다 동유럽을 휩쓸고 우랄산맥을 넘은 이 바람이 동북아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한반도가 알게 모르게 중심권에 빠져든 것이다. 고르비, 그는 누구인가? 그는 우리에게 순풍인가, 역풍인가?

미하일 세르게이비치 고르바초프. 59세. 소련 북코카서스의 스타브로폴 출신 법학도. 경쟁심과 과단성이 특출하고, 농업정책의 첫손 꼽히는 전문가. 철학박사학위를 지닌 부인 라이사와의 사이에 1녀. 레닌 이후 제일 훌륭한 소련연방 지도자. 국제질서에 격랑을 일으키는 세계적 인물….

세계 유명도시 서점가에 진열된 5~6종의 고르비 전기는 대부분 위에 열거한 항목들을 엮고 늘려서 만든 평전류의 단행본들이다.

고르비의 양면성 극복이 한국의 숙제
 그에 비한다면 닉슨 전 미국대통령의 평가는 약간 색다른 데가 있다. 닉슨은 지금도 고르바초프를 애칭 ‘미샤??로 부르고 있으나 혹평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선전과 홍보의 타고난 전문가다.?? ??권력을 애호하며 권력유지를 이해선 어떤 수단방법도 강구할 줄 아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다.??

 지난 87년, 고르비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으며 90년초 다시 ??80년대의 인물??로 선정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의 경우 닉슨과는 달리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르비야말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적자생존 원리를 펼친 다윈, 인간의 잠재의식을 분석한 프로이트를 합친 존재라고 극찬했다. ??공산주의세계의 교황, 소련의 마르틴 루터.??

 지난해 연말 사망한 소련의 인권운동가 사하로프 박사가 본 고르바초프는 한마디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 이유를 사하로프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고르비)가 오른쪽으로 틀면 나라 전체는 왼쪽으로 기운다. 개혁파를 신랄하게 꾸짖는 발언을 해도 실제 정책은 반드시 후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같이 상반되는 평가를 종합할 때 드러나는 한가지 공통점은 그의 면모나 행동양식이 모호성 또는 양면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결국 이 양면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한국 또는 한국인에게 와닿는 ‘고르비의 의미??가 달라진다. 미국의 저명한 소련전문가 헬무트존넨펠트(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씨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는 한국과의 경제적 거래를 통한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한반도의 분쟁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서는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사회주의체제의 침식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의 연설 속에는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낱말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고 이번의 한·소 정상회담 현장을 취재한 미국의 한 기자는 귀띔했다. 미국의 저명 일간지의 모스크바특파원을 역임한 이 기자는 “그렇다고 고르비를 비공산주의라고 보면 큰 오산??이라며 그의 개혁은 ??레닌주의의 포기가 아닌, 레닌주의에의 복귀??라고 못박았다.

 그는 사회주의국가의 지도자이면서도 곧잘 ‘하느님의 존재??를 언급해왔다. 지난 85년 《타임》과의 회견에서 그는 ??미?소관계의 개선방안을 모색하는 데 하느님의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뉴스위크》와의 대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점 또한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으며, 레이건과 만나 자리에서 자기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털어놓았다??고 알려진 그의 수수께끼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교포가 개발한 씨앗 보급해 수확 초과달성
 그렇다면  고르비가 한국 ‘한국인을 보는 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고르바초프의 은사이자 현재 소련 타시켄트 관개기술 및 농업경제대학의 학장인 한국계 빅토르알렉산드로비치 엄(한국명 엄승범)박사가 모 일간지 특파원에게 밝힌 내용은 자못 흥미롭다.

 고르비는 모스크바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검사직을 사양하고 귀향, 78년 중앙공산당농업담당서기로 발탁될 때까지 23년간을 줄곧 고향에서 지방당 서기와 집단농장의 책임자로 지냈는데 그가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어 중앙당으로 영전한 데는 그 지역에 사는 한국계 교민의 덕이 컸다는 것이다.

 고르비는 지방당 제1서기 시절, 영농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으며 이론무장을 위해 스타브로폴농업경제대학에 편입, 그 대학 경제학부 부장으로 재직중이던 엄 박사와 조우하게 된다. 고르비는 한국인 교포가 개발한 개량품종을 관내 전농장에 보급하는 한편, 신속한 수확(이파토보 방식)으로 전년보다 50%를 초과 수확, 브레즈네프로부터 훈장과 상패를 받게 된다.

 한마디로 고르비의 출세배경에 한국인교포의 노력과 아이디어가 개재돼 있다는 주장인데, 고르비는 한국인의 자녀교육열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이런 점 역시 한국에서의 고르비돌풍의 풍향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표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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