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사령탑 베이커의 고민
  • 변창섭 기자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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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패배주의 씻고 외교 치적 훼손 말아야


 

 최근 휴가차 본국에서 2주간 머물다 서울에 돌아온 주한 미대사관의 한 외교관은 현지의 대통령 선거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의 클린턴 후보 중 어느 쪽을 찍을 것인지 물어보았다. 대부분은 아직도 어느 후보를 찍을지 망설였다. 예전같으면 대통령 선거를 불과 3개월 남겨놓고 유권자들이 후보를 이미 점찍어 두었을 시점인데도 그들은 주저했다. 내가 만난 공화당원 가운데도 망설이는 사람이 있었다. 현직 대통령의 프리미엄은 옛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같은 유권자의 태도는 분명 부시 대통령에게 나쁜 뉴스가 아닌가.”

 올 11월 대통령 선거를 겨우 석달 남짓 남겨두고 부시 대통령이 선거전에서 악전고투한다고 외신은 전하는데 이 외교관의 입을 통해서도 그것이 확인됐다. 상대 후보인 클린턴에 비해 각종 여론조사에서 밀려온 부시 대통령이 최근 마침내 베이컨 국무장관을 자신의 선거전 사령탑 자리에 임명한 것도 사태의 절박성을 알리는 거이다. 오랫동안 국무부 출입 기자를 하며 베이커 장관을 그림자처럼 취재하고 있는 〈뉴욕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맨에 따르면 베이커 장관은 막바지 순간까지도 국무부에 남아 있기 원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베이커 장관은 탈냉전 이후 소련의 붕괴·독일 통일·동유럽 공산주의 와해 속에서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해 세기적 사건들을 원만히 처리했다. 또한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히는 중동 평화 회담도 미국 주도로 지나내 10월 첫회담이 열린 이후 멀지 않아 큰 진척을 보일 것이 예상된다. 베이커로선 자신이 부시 대통령의 재선 운동에 뛰어들 경우 지난 3년반 재임 기간중 쌓아온 이같은 치적이 사라질 수 있음을 우려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막판까지 국무장관직에 연연했다고 한다.

 베이커가 맡은 백악관 비서실장 겸 수석자문관이란 직책은 사실상 대통령 다음가는 막강한 자리다. 특히 수석자문관이란 직함은 베이커가 국무부를 떠나 있어도 여전히 막후에서 중대한 외교 정책을 주무를 수 있음을 뜻한다. 많은 사람이 로렌스 이글버거 국무장관 대리를 앞으로 11월 대통령 선거 때까지 3개월여 동안 국무부를 임시로 맡을 ‘땜질용’ 인물로 평가 절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은 떠나 있어도 언제든 간섭하고 복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레이건 때와는 상황 달라…막판 역전 노려

 그러나 결국 베이커 장관도 35년 지기이자 현재 심각한 위기에 빠진 부시 대통령의 긴급 구조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커는 레이건 대통령 시절 5년간 비서실장을 지냈기 때문에 누구보다 선거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알고 있다. 지금껏 화려한 외교 무대에서만 활동해온 베이커로서는 다시 ‘지저분한’ 정치판에 뛰어들려니 괴로울 뿐이다. 많은 사람이 예상하듯 선거전이 고전하면 베이커도 상처를 입는다. 그렇다고 부시가 재선되어 다시 국무장관으로 복귀해도 이전투구의 선거전에 발을 들여놓은 전력 때문에 그의 권위나 신뢰도는 예전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부시가 패하면 그나마 국무장관으로 쌓아놓은 혁혁한 외교 치적은 물거품이 되고 실패한 정치 조언자로 기억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금껏 탄탄대로를 달려오 베이커에겐 악몽일 뿐이다. 그러나 부시 재선 운동 사령탑의 중책을 맡은 이상 베이커는 지난 날 ‘선거 운동의 귀재’라는 영예에 걸맞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바로 여기에 베이커의 고민이 있다. 지난 88년 재무장관을 그만두고 부시 후보의 선거 책임자로 옮길 때만 해도 여건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민주당의 듀카키스 후보는 부시 후보에게는 지금의 클린턴처럼 막강한 상대는 아니었다. 경제도 지금처럼 엉망은 아니었다. 부시는 무엇보다 화려했던 레이건 정부의 후광을 업을 수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유권자들에게 보여줄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딴 판이다. 근세 대통령 선거 사상 볼 수 없는, 야당 후보가 현역 대통령 훕보다 두배 이상의 인기도를 유지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는 휘청대고 있고 현실 문제의 해결 능력을 보여줘야 할 절박한 상황에 있다. 국내 정책의 성공이 담보되지 않는 한 부시의 재선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 되어 있다. 베이커는 바로 이처럼 엄청난 현실 앞에서 고민한다.

 당장 베이커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직도 결정을 망설이고 잇는 대다수 유권자에게 국내 문제의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클린턴 후보측이 내세우는 여러 공약에 비해 수사가 아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다해야 하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선거공약으로 사회 복지 문제·낙태 문제·자녀의 학교 선택 문제 등에 대한 일반론을 펴기는 했어도 구체적으로 실천 강령은 내놓지 않았다. 베이커로서는 실천책을 만들어 되도록 많은 유권자에게 먹히게끔 전략을 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적을 앞에 두고 벌써부터 공화당 내에는 분열의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 첫 징후는 지난 17일부터 4일 동안 열린 휴스턴 전당 대회에서도 드러났다.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역사적인 전당 대회에서도 드러났다.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역사적인 전당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화당 인사가 불참했다. 열기도 그리 뜨겁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많은 공화당원 사이에 퍼진 패배주의 탓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클린턴 후보에게 밀려온 결과가 공화당원들에게 패배주의심리를 갖게 만든 것이다. 베이커로선 급속히 확산하고 있는 이같은 패배주의를 얼마나 빠른 시일 안에 씻어내느냐가 큰 과제이다.

 8월23일부터 선거 사령탑에 앉은 베이커가 88년처럼 부시를 위해 승리의 기적을 만들어낼지 아직 예측할 수 없다. 서울 주재 미국 외교관의 지적대로 부시의 재선 여부는 베이커란 한 인물의 천재성보다는 경제 회복과 같은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 여부에 더 크게 좌우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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