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의 業, 內紛 1백일
  • 편집국 ()
  • 승인 1990.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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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격했다. 국민의 시선을 인질로 삼아, 당내 ‘自害戰’의 양상으로까지 치달린, 말 그대로 泥田鬪狗였다. 4월30일로 ‘통합 1백일’을 맞는 거대여당 민자당의 현주소다.

 굳이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자면, 朴哲彦정무장관의 사표를 따낸 金泳三최고위원의 승리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누가 이기고 지고를 따진다면 싸움의 두 장본인은 국민 앞에서 또 한차례 愚를 범하는 꼴이 된다. 큰 상처를 입은 것은 민자당 그 자체다.

 박장관이 거세됐다 해서 ‘제2, 제3의 박철언’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김최고위원은 그때마다 이전투구를 되풀이하거나 번번이 ‘당권 도전을 향한 진일보’를 자축할 수도 없을 것이다.

 ㅅ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정공한 최병학씨(36 · ㅇ교역 무역부장)의 관전평은 이렇게 요약된다. “문제는 이런 싸움을 있게 만든 한국형 정치풍토, 구체적으로 당내의 그릇된 지도체제입니다.” 그는 부연한다. “이런 싸움을 애당초에 누가 붙였습니까. 사람 서넛을 다뤄봤거나, 직장 경험이 2~3년된 사람이면 누구나 그 답을 압니다. 회사 안팎은 물론 우리 주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정치후진국의 갈등양상이지요.”

 이번 싸움으로 민자당의 ‘흔들리는 당권’이 노정됐다는 것이 최씨의 결론이다. 김최고위원과 박장관과의 싸움은 한갓 代理戰에 불과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싸움의 실제 주역은 같은 배를 탄 盧泰愚총재와 김최고위원이며, 둘이서 배의 침몰을 각오하고 벌인 암투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계속 남는다. 당권장악이나 도전에 임하는 자세와 ‘양식’이다.

 86년 5월, 도쿄에서 열린 서방7개국정상회담(G-7회담)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은 뒤따라온 政敵 자크 시라크 총리 때문에 적잖이 골치를 앓았다.

 시라크 총리는 회의나 만찬 때마다 기를 쓰고 대통령과 동석, 미테랑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했다. 당시 프랑스는 사회당 대통령과 공화파 총리가 병립하던 同居정부(코아비타시옹)시절이었다. 우리 통념으로 미뤄봐서 특이했던 사실은, 당시 미테랑 대통령이 단 한차례 불편한 심기를 토로한 적도, 또 프랑스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한 적도 없다는 점이다. 한갓 외신에서 화제성 뉴스로 다룬 데 불과했다. 미테랑의 여유와 관용은 2년후 대통령 재선에서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소련방문 ‘동행’이후 끊이지 않은 김 · 박 내분이 2주 남짓 정치의 핵심문제가 되어야만 했던 한국적 정치풍토, 또 언론이 이를 경쟁적으로 대서특필한 우리의 정치문화, 미테랑과 시라크의 2인1각은 우리가 한번쯤 짚어보아야 할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월22일 盧泰愚대통령과 당시 민주당의 金泳三총재, 공화당의 金鍾泌총재가 오찬과 만찬을 겸한 9시간의 마라톤회의 끝에 발표한 3당통합 신당선언 공동발표문을 살펴보자. 그중에는 “…당파적 이해로 분열 대결하는 정치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지난날의 배타적 아집과 독선, 투쟁과 반목의 구시대정치를 활활 타는 용광로에 불사르기로 했다”는 대목이 있다. “우리 모두의 미래를 힘차게 열어가는 희망의 정치,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신뢰의 정치, 각계의 자율과 참여를 폭넓게 수용하는 성숙한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구절도 눈에 띈다.

 그러나 합당 당시의 이처럼 거창한 구호와 화려한 기치는 어느새 퇴색되고 창당전당대회를 갖기도 전에 계파간에 분열과 반목의 깊은 골을 파놓기에 이르렀다.

경제 · 사회적 현안 해결에 ‘낙제’

 그 동안 민자당은 국민생활과 직결된 경제 · 사회적 현안에는 전혀 해결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계파간의 이해다툼에만 급급해왔다. 의석수에 있어서는 골리앗의 몸체를 지니게 됐지만 거대여당으로서의 역할이나 기능면에 있어서는 낙제점을 면할 수 없었다. 국민들에게 희망보다는 좌절과 불안을 안겨주었고 신뢰보다는 불신과 환멸을 심어주었다. 정치가 성숙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의 길을 걸었다.

 이에 따른 당연한 귀결로 4 ·3 보궐선거에서 참패의 쓰라림을 맛봐야 했다. 그런데도 선거 결과를 겸허하고 냉정하게 받아들여, 자성의 계기로 삼겠다던 민자당은 이 기회를 내분을 노골화하는 데 악용했다. 김총재는 보선과정에서의 당운영의 舊態, 개혁의지의 실종, 민정계의 독주 등을 들어 민정계를 정면 공격한 데 이어 청와대 고위당정회담에 불참함으로써 노대통령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도 있는 충격대응을 취했다. 여기에 박장관의 ‘직격탄 발언’이 퍼부어짐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박장관의 발언은 그것이 우발적이었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건 온 국민에게 경악과 충격을 안겨주면서 본인 스스로 정치적 결격과 미숙성을 증명해 보였다.

 그의 발언에 온 국민들은 ‘공개되면 하루아침에 정치생명이 끝날’ 만큼의 ‘秘事’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과연 그 내용은 무엇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됐다.

 박장관의 발언에 대해 민주계의 ㄱ의원은 “정보를 독점하고 자금을 손아귀에 쥐었다고 세상을 돈짝만하게 생각하는 기계적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장관이 대통령이나 자기를 끝까지 적으로 간주한다면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고 했던데, 이는 자신을 노대통령과 동격으로 간주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狐假虎威라는 옛말처럼 대통령의 권위를 끌어들여 자기를 내세우려는 발언은 오만하다 못해 비열한 짓이다”

 ㄱ의원외에도 민주계에서는 욕설에 가까운 원색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제2의 車智澈을 연상케 한다” “아무리 철이 없다고 그렇게 까불 수 있나. 황태자 환상에 젖어 있는 그를 내버려두면 대통령에게도 해로울 것”이라고 흥분했고 어떤 의원은 朴장관에 대해 ‘저런×’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그가 끝장을 보겠다는 식이라면 민주계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언성을 높였다.

 

민주계에선 한때 탈당까지도 생각

 이처럼 이성과 양식을 내팽개친 채 감정과 사리에만 얽매인 양계파간의 공방을 지켜보면서 국민들은 “이런 꼴을 보이려고 합당을 했느냐”며 거대여당에 대한 강한 불신과 함께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듯 했다.

 이를 반영하듯 《시사저널》이 ‘통합 1백일’을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3당 합당에 대해 찬성하는 반응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2~13면 참조). 보궐선거 직후인 4월7일~8일에 실시한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28.2%가 ‘잘된 일’이라는 반응을 보인 반면 44.5%가 ‘잘못된 일’이라고 대답했다. 찬성의 비율은 합당직후 39.1%, 임시국회 폐회직후 33.0%로, 시간이 지날수록 현저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반면에 ‘모름 · 무응답’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아져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소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민자당 내분으로 노대통령도 통치권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는 김최고위원과 박장관과의 대결양상이 악화일로를 걷고 국민들의 민자당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고조되고 있는데도 이렇다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박장관 스스로 사표를 제출케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같은 비판은 평소 노대통령이 악역은 되도록 피하고 항상 온화하고 인자한 얼굴의 지도자로 부각되기를 바라는 ‘무서운 일면’과 맥을 같이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처럼 자칫 우유부단으로 비칠 수도 있는 태도 때문에 노대통령이 박장관을 감싸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박장관의 발언은 사실상 노대통령의 양해 아래 ‘主君’의 심정을 대신 표현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문제의 발언으로 양측이 일촉즉발의 한계상황으로 맞서 있을 때 민정계 중진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박장관이 펼치고 있는 ‘외로운 싸움’을 방관하고 있다고 질책, 사실상 박장관에 대한 지원을 독려함으로써 가뜩이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민주계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최고위원은 박장관이 정치의 현장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탈당을 불사하고, 최악의 경우 극한적인 정치운동을 펼 구상까지 하고 있었다는 뒷얘기이다 .

 이제 주요관심은 앞으로 김최고위원의 당내 입지와 위상에 쏠릴 수밖에 없다. 그는 평소 주장해왔던 대로 당의 체질개선 · 정책개혁 · 당정협조 등을 내세우며 당무에 있어 강력한 권한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김최고위원은 또 민정계와의 內戰과정에서 주장했던 공작정치의 중단을 계속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민정계와의 정보공유 및 정치자금의 원활한 조달 등 정치적 운신의 폭과도 관련되어 있어 크게 비중을 두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또 박철언장관만 하더라도 그가 완전히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노대통령과 박장관과의 관계로 보나 박장관이 월계수회 등을 통해 구축해 놓은 세력기반으로 보나 어떤 형태로든 재기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민주계가 허용하거나 여론의 시각이 개선되지 않는 한 재기는 힘들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북방정책을 비롯해 그가 지금까지 벌여왔던 일을 통해 노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보좌는 계속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아무튼 17일의 청와대 회동으로 싸움은 이제 수습국면에 들어섰다. 싸움의 당사자들도 서둘러 체면유지에 급급, “특정인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다” (김최고위원)거나 사표제출 직후 하필이면 ‘임진각’으로 머리를 식히러 드라이브하는(박장관) 등 싸움의 명분을 달기에 바쁘다. 싸움의 주역과 관전자 모두를 지치게 만든 2주일이었다.

 

민자당 100일

 1월22일 3당 통합 선언.

 1월23일 3당 15인통합추진위원회 인선.

 2월7일 3인 공동대표를 최고위원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의 당헌 시안 확정.

 2월8일 당명을 民主自由黨으로 확정.

 2월9일 민자당 공식 출범.

 2월13일 당3역 및 대변인 등 주요 당직자 임명. 당직안배에 따른 알력 본격화.

 2월15일 중앙선관위에 합당 등록. 서울 여의도 당사 현판식.

 2월27일 사무부총장·기조실장 등 하위당직자 임명을 각 계파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당초   예정보다 일주일 늦춰 발표. 월계수회 부상 뚜렷.

 3월6일 민주계 소장파 의원 6명, 공개모임 갖고 당의 개혁의지 실종 및 당운영방식의 문제  점 제기. 7인 조직강화 특위, 1차로 1백50명 조직책 발표. 조직책 선정 둘러싼 진통 가속   화.

 3월9일 민주계 9인 결속모임. 朴哲彦장관 독주에 신랄한 비판. 민정·민주계 대립 증폭되기 시작.

 3월12일 국회 국방위 군구조개편 관련법안 날치기 통과로 파문.

 3월19일 당권 핵심인 당무위원 45명 확정. 계보정치 본격화.

 3월20일 金泳三최고위원 소련방문. 박장관의 동행이냐, 수행이냐 신경전.

 3월21일 첫 당무회의. 일부 의원들 금융실명제·토지공개념 연기 방침 등 개혁정책 후퇴에 강력 반발.

 3월29일 김최고위원 귀국. 방소 성과 및 외교주도권 문제로 박장관과 팽팽한 대립 시작.

 4월3일 대구 西甲과 진천·음성 보궐선거 패배. 계파간 공개적 공방 시작.

 4월6일 김최고위원 보궐선거 참패 이유로 민정계 강력 비난. 계파갈등 표면화.

 4월7일 김최고위원 청와대 당직자회의 불참. 朴泰俊대행 정면 반박.

 4월8일 盧在鳳청와대비서실장 상도동방문.

 4월10일 박정무장관 폭탄 발언.

 4월11일 부산 지구당개편대회에서 김최고위원 ‘공작정치’ 거듭 강조.

 4월12일 金鍾泌최고위원, 김영삼최고위원과 회동.

 4월13일 박장관 사표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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