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 누운 4월의 사자들 "고귀한 피 이용하지 말라"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0.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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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와 함께 '그날의 恨'간직…투병하며 4 · 19정신 키워

 그날의 함성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지만 뼛속 깊이 그날의 恨을 떠안고 사는 이들이 있다. 4 · 19당시 부상당해 30년 세월을 병고와 후유증에 시달려온 사람들. 역대 군사정권의 그늘에서 해를 거듭할수록 그 의미가 왜곡·축소돼온 '4·19'의 산 증언자로서 오늘 중년의 삶을 살고 있는 30년전 '4월의 사자들'을 찾아보았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에는 아직도 당시의 부상으로 투병중인 환자가 6명이나 있다 내과병동 5127호에 입원중인 鄧亨泰(53)씨는 4·19 당시 동국대 법과 3년생으로 경무대 앞에서 경찰봉에 머리를 맞고 두개골 파열상을 입었다. 적십자병원에 6개월간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으나 완치되지 않아 계속 정신신경과 등의 치료를 받고 있다. 이번 4월로 다시 시작한 입원생활이 10개월째로 접어든다는 그는 병상에서 맞는 4·19 30돌의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으로 보아도 30년이면 성년이고 큰일을 할 수 있는 나이인데 그동안 4 · 19가 그 본뜻을 살리지 못하고 매년 형식적 행사로 그쳐온 점,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수유리에 묻힌 영령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4 · 19에 대한 올바른 조명으로 '미완의 혁명'을 마무리짓는 일이라고 정씨는 역설한다. 그는 또 요즘 흔히 지상보도에 '내가' 당시 ㄱ대학교 주역이었느니 ㄴ대학교 주역이었느니 나서는 사람들을 굳이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며 4 · 19의 고귀한 희생을 사사로이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긍지와 자부심으로 그날을 웅변하는 정씨와는 달리 옆 침상의 李炯松(47)씨는 시종 침묵을 지킨다. 당시 고교 3년생으로 광주 전남일보사 앞에서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한 이씨는 이후 22차례나 절단 부위를 재수술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뼈가 자라 피부를 뚫고 나오기 때문에 그때마다 이를 잘라내야만 하는 것이다.


고문으로 뇌 손상 정신분열되기도

  이밖에도 보훈병원 정신병동에는 4명의 환자가 더 있다. 80년부터 지금껏 정신병동에 장기입원중인 ㅈ씨 등 4명은 병세가 심해 일반의 면회가 일체 허락되지 않는 형편이다. 4 ·19 당시 모두 고교생이었던 이들은 시위중 머리를 다치거나 고문으로 뇌에 손상을 입어 정신분열증을 일으킨 환자들로, 이중에는 당시의 충격으로 자신이 부통령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환자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장기입원중이거나 밥먹듯 병원을 드나들어야 하는 4·19 상이자들은 자연 그 생계마저 어려워 뒷바라지하던 가족들에게서조차 외면당한 불운한 경우도 많다. 4·19당시 오른팔과 턱, 가슴 등에4발의 총상을 입고 한쪽 팔을 잃은 ㅂ씨(46·여) 역시 '그날'이후 예기치 못했던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기구한 삶의 주인공이 되었다. 손수레행상, 보따리장사 등 모진 삶을 살다가 윤락가에 몸을 던지기까지 했던 ㅂ씨는 지금도 신장·심장등의 합병증으로 진통제에 의지해 살고 있다.

  "매년 이맘때면 우리같은 4 · 19 부상자들에게 반짝 플래시를 터뜨리는 매스컴이나 쥐꼬리만한 연금을 던져주는 정부나 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60년 4 · 19 전야 시위대의 탈취차량 위에서 "부정선거 다시 하라! "고 밤새껏 목이 터져라 외치며 서울 시내를 누볐던 그 소녀는 지금 빚에 몰려 법원의 차압딱지가 붙은 월세방에 몸져 누워 있다. 꽃다운 나이의 의분도 잠깐 "보잘것없는 밑바닥인생으로 떨어져내려 평생 서러움 속에 살다 간다"고 ㅂ씨는 한숨짓는다. 그가 지난 30년 동안 국가유공자로 받은 연금은 다 합해야 4백만원 남짓. 올해부터 기본연금이 월 15만원으로 오르긴 했으나 광주피해자보상 수준을 고려해 연금을 현실화해달라는 것이 4 · 19상이자들의 절박한 요구다.

  한편 하반신마비의 몸으로 양궁선수가 된 金虎成(52)씨의 경우처럼 불굴의 의지로 새삶을 개척한 이들도 적지 않다. 척추관통상을입고 10여년 병상생활 끝에 82년부터 양궁을 시작, 88서울장애자올림픽 등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김씨는 "활시위를 당기며 모든 미움을 묻어버 렸다"고 담담한 심정을 밝힌다.


정부가 푸대접해도 우리는 반드시 일어선다"

  4 · 19의거상이자회 관계자들은 회원 2백37명중 현재 취업후 자립한 경상이자와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는 중상이자의 비율이 7대3 정도라면서 30년만에 벌이는 4 · 19 '뿌리찾기' 사업에 정부가 여전히 푸대접을 하고 있다고 서운해 한다.

  지난 2월 4 19의거희생자유족회, 4 · 19의거상이자회, 4 · 19회 등의 관련단체들이 통합돼 발족한 범4 · 19혁명기념사업회는 현재 4 · 19의 국경일 제정 및 서울시내 중심지 4 · 19광장 조성, 국정교과서에 실린 4 · 19에 관한 왜곡된 내용 수정 등 5개 사업을 계획, 이를 국회에 청원중이다.

  "4 · 19는 5·16을 미화하며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버렸습니다. 3공, 5공 내내 '4 · 19정신'은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어둠을 헤치고 있다고 할까요? 30년만에 처음 갖는 기념사업에 한푼도 국고 지원이 없다는 게 가슴 아프지만 우리는 반드시 일어설 겁니다. "

  이번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후원금 모금에 보내준 국민들의 뜨거운 호응에 큰 용기를 얻었다고 4 · 19의거상이자회 회장 張次平(49)씨는 말한다. 독재자의 총탄에 피를 뿌린 '그 날' 이후 오랜 병상생활을 통해 비로소 '4 · 19정신'의 싹을 틔웠노라는 한 4 · 19상이자의 뼈저린 고백은 여전히 '자유 · 민주'로의 험난한 도정에 서있는 90년대의 우리들 모두가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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