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청사건 피해자 梁源太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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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삭이며 사랑을 키웠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화창한 대학가의 3월.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는 일상처럼 익숙해진 특이한 풍경이 있다. 한 하반신마비 학생이 장애자용 자가용을 몰고 교정에 들어서면, 기다렸다는 듯 한떼의 학생들이 다투어 몰려들어 차에서 휠체어를 내리고 그를 조심스레 앉힌다. 그가 휠체어를 굴리며 강의실을 향해 가는 동안 주변에서는 그를 반기는 인사가 끊이지 않는다. 강의실 앞에는 그를 업고 갈 '당번'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휠체어의 그는 다름아닌 87년 12월 '구로구청농성사건' 강제진압 과정에서 5층강당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梁源太 (27 ·서울대 경영학과 4년)군. 사고 직후 주치의로부터 최악의 경우엔 평생 침대신세를 져야 한다는 '재기불능'의 선고를 받았던 그가 학우들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세상이 '역사의 건망증' 속에서 그를 잊어가는 동안, 그의 꺾인 꿈과 다시 일으켜세운 꿈은 무엇일까? 3월 어느 일요일, 구로구 구로동 주공아파트 111동 605호 그의 집을 찾았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찾아온 학교 친구들(이미 졸업했다)에 둘러싸여 기자를 맞는 그의 표정은 티없이 해맑았다.

 

● 밝은 모습을 보게 되니 참 반갑습니다. 사고 당시에는 비관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돌았는데요. 언제부터 학교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인가요?

  병원에 있을 때부터 너무 공부가 늦어지면 좋지 않다는 주위분들의 충고가 있었어요. 그래서 입원중에도 학기 등록을 해서 수업을 못받는 대신 리포트로 시험을 치렀거든요. 정식으로 학교에 복학한 건 지난해 봄부터입니다. 휠체어는 익숙해졌는데 택시신세를 꼭 져야 할 형편이라 좀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후원회'를 통해서 이름을 밝히지 않는 고마운 분들이 장애자용 자가용을 마련해주셔서 한결 수월해졌지요. 또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강의실까지 업어다주고요

● 예전과 달라진 조건에서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특별히 고충을 느끼는 점은 없는지요?

  병원에 있을 땐 복학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잖아요? 3년 가까이 다니던 학교지만 여러 여건이 달라진 채 돌아와서 그런지 전혀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제 손으로 차를 몰고 휠체어 타고 강의를 듣고 친구를 만나는 일, 남들 눈엔 별것 아닌 일로 비치겠지만 정말 특별한 기쁨으로 다가와요.

● 그렇듯 특별한 기쁨을 느끼는 건 지난날의 고통이 특별했던 때문이겠지요.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는데, 원래 대학 입학 때 지었던 포부와 꿈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아버님께서 평교사로 30년 넘게 지내시면서 5남매(2남3녀)를 다 대학공부시키시느라고 집안이 항상 어려운 편이었거든요. 돈을 좀 제대로 벌어 늘 살림에 쪼들리는 부모님 해외여행도 시켜드리고 싶은, 그런 순진한 소망이 있었어요. 또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무렵은 우리사회가 고도성장 사회로 질주하던 때였잖아요. 그런 사회환경 탓인지 가진 것 하나 없이 비전과 땀만으로 세계시장을 개척하는 무역인들을 은근히 선망했어요. 경영학과를 택한 데에는 어릴 때의 꿈이 작용한 거지요.

● 개인적으로 운명의 큰 고빗길이 된 '구로구청' 사건이 있기까지 그 꿈은 계속 유효했읍니까?

  글쎄요. 완전히 바뀐 건 아니고, 그대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한참 망설이다 웃으며) 달라졌다는 게 정확한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 이 사회를 둘러싼 모순의 실체를 어렴풋이 감지하게 되고 기존의 가치관과 삶의 좌표에 회의를 느끼는 학생들이 많잖아요? 저도 그냥 그 가운데 하나였지요. 민중들이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한 채 억압받는 사회 , 군사독재의 폭력성이 엄연히 상존하는 우리 사회구조의 모순 속에서 개인적 성취만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악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꿈이 달라졌어요. 그렇다고 똑 부러진 결론을 내린 건 아니고요, 다만 억울하고 짓밟힌 민중들 편에 서서 사는 삶이 이 나라 지성인의 올바른 선택이라는 정도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고나 할까...(구로구청 사건 직전 그는 3학년 1학기 다니던 중 입대, 87년 10월 제대한 뒤 복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 '구로구청 사건'은 가장 최근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인데도 '잊혀진' 사건이 되어버리고 만 느낌인데요. 또 사건을 보는 시각도 '민주적 선거를 지켜내려는 시민투쟁' 혹은 '이미 대선의 승패가 드러난 시점에서 결과를 뒤집기 위한 운동권의 전략'이라는 등 엇갈리는데요. '농성'에 참여한 개인적 동기는? 

  모처럼 치르는 대통령선거라 모두들 거는 기대와 열기가 대단했잖아요? 대학생들도 이번만은 제대로 민주적인 선거가 되도록 감시하자고 '공정선거감시단(공감단) '에 참여했고요. 마침 복학할 때까지 바쁜 일도 없고 '공감단' 활동이 시민의 한 사람으로 의미있는 일이겠다 싶어 선뜻 참여했지요. 구로지역이 저희 학교의 활동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개표 당일 오전 구로구청에 나가 있던 공감단 후배들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어요. 부정투표함으로 보이는 투표함 4개가 빵봉지 같은 걸로 덮여 구청마당을 몰래 빠져나가다 적발되었다는 거예요. 당연히 그날밤 현장으로 달려갔지요. 가보니 문제의 투표함만이 아니라 사무실 안에서 발견된 붓두껍, 인주, 부재자투표용지들이 있었지요. 선거부정을 규탄하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모여들었고 다만 학생, 재야운동지도자들은 현장을 지도한 것뿐이지요. 농성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관위측의 납득할 만한 해명과 법적인 증거보존뿐이었어요. 마지막 진압이 있기까지도 평화적으로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 문제가 된 12월18일 새벽 경찰의 진압에서 경찰은 농성자들이 극한적으로 맞섰기 때문에 강경진압이 불가피했다고 밝혔었는데요.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이미 돌았기 때문에 당시 구로구청에는 2백~3백명의 학생 · 시민밖에 없었지요. 그날 새벽 마당에 있는데 갑자기 눈을 도저히 뜰 수 없이 참기 어려운 최루탄이 터졌어요. 거기에 쫓겨 5층강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위기감 때문에 책상걸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았지만 좀 지나자 밀려온 가스에 질식해 서로 밀리고 엎어지고 경황이 없었어요. 곧이어 몽둥이 ·도끼를 든 백골단들이 들이닥쳤는데 제 가까이선 "살려주세요" 하는 비명소리도 들렸습니다. 저도 밀리고 엎어져 있다가 일어서려는 순간 백골단이 휘두른 몽둥이에 어깨를 맞았어요. 그 순간 어깨가 쪼개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아뜩해졌는데 깨어나보니 구청 시멘트 바닥이었습니다. 의식은 드는데 몸을 일으켜세울 수 없어서 바닥에 엎드린 채 있는데 지나가는 전경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발로 툭툭걷어차며 "이새끼, 죽은 거야, 산 거야" 그러더군요.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또 가물가물해졌어요.

  (한참 뒤에야 고려대 구로병원으로 옮겨진 그에겐 척추 3,4,5번 마디가 완전히 절단되고 명치 아래의 중추신경이 도막도막 끊겼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는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부러진 척추뼈를 두개의 철골로 잇대는 대수술을 받았다. ) 

● 병원에 옮겨지고 난 뒤 일주일만에야 의식을 회복했다고 하던데요. 처음 의식이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요?

  눈을 떠서 '아,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느낌도 잠깐이었지요. 팔과 머리밖에 움직일 수 없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 걸어야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때로선 걸을 수 없다는 게 죽음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거든요. 한달쯤 지난 뒤에야 하반신마비를 현실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헌데 가까스로 현실을 인정하고 나니 또다른 갈등이 찾아오더군요.

● 그런 몸으로 평생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막막함 같은 것입니까?

  그런 고민은 차라리 사치스러운 것이었지요. 우선 당장은 어머님, 아버님, 주위 여러 친구들이 저 때문에 겪는 고통과 희생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게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이때까지 밝은 모습으로 구김살없이 대답하던 그는 그때의 고통을 떠올린 탓일까,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 간호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거든요. 뭐 하나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다가, 한쪽으로만 누워 있으면 살이 썩어들어가니까 2시간마다 한번씩 자세를 바꿔줘야 했으니까요. 낮에는 어머님이, 밤에는 친구나 선배들이 번갈아 병실을 지켜줬어요. 말할 수 없이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얼마나 더 많은 날을 주위분들의 희생 속에서 살아야 하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서까지 내 삶을 지탱해야 할 만큼 의미가 있는 것일까, 머리속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어요.

● 그런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요 ?

  수술 후 처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게 되었을 땐데요, 창밖으로 오밀조밀한 주택가, 공장굴뚝, 멀리 지평선에 걸린 노을이 마치 처음 보는 듯 너무 아름답게 보였어요. 사람이 사는 모습이 저런 거구나 하는 감동이 다가오더라구요. 나도 하루빨리 이 병원문을 나서야지 , 그래서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나가는 저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고 어울려야지 , 그렇게 살다보면 내 삶도 어떤 의미를 갖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그때부터 간이침대에 몸을 묶고 침대를 90도 각도로 올린 채 견디는 연습에 들어갔어요.

  (옆에 함께 한 친구들은 입원 당시 그는 약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물리치료에 가장 열성적인 환자였다고 덧붙였다. 그 덕분인지 비슷한 사고를 당한 한 환자가 1년8개월만에 퇴원한 것에 비해, 그는 입원 8개월만인 88년 8월에 병원문을 나섰다.)

● 그런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그런 불행을 가져다준 사람들. 가깝게는 진압경찰 멀리는 정권담당자에 대한 분노나 원망도 컸으리라고 짐작되는데….

  사실 처음에는 분노를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속으로 끓어오르는 게 있었지만 그런 분노를 계속 키워나가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은 되도록 안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대신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이런 아픔과 희생을 감수하려 했던가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되뇌었어요. 올바른 분노는 더 큰 '사랑'에 입각한 것이어야지 자기의 고통에 대한 이기적인 반응이어선 안되니까요. 하지만 생활 속에서 그때그때 고통을 느낄 때마다 많이 흔들렸어요

● 어떤 고통을 말하는 건지요?

  (한참 망설이다) 자신의 몸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느낄 때였는데요, 아직도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소변문제가 제일 불편했던 것 같아요. 가슴 아래로는 감각이 없어졌기 때문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을 치르고서도 몰랐거든요. 누가 이야기해주어서 살펴보면 침대가 다 젖어 있고‥‥그럴 때마다 '아, 이꼴이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이 울컥 치밀어오르곤 했어요. 또 어머님이 그걸 다 치우셔야 하잖아요? 어머님이 밤새 저를 간호하시느라 부석부석해진 얼굴로 그걸 치워내는 걸 보면서 가슴이 무너져내리고‥‥흔들릴 때마다 누군가 옆에서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의 어머니는 평소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의연하게 잘견디는 원태군이 지금도 이런 '실수'를 저지를 때 가장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한다며 안쓰러워한다.)

● 아버님(梁東植 53·풍문여고 국어교사)께서 한 호소문에서"제발 우리 원태가 이 나라 이 시대의 마지막 희생자이길 빈다"는 간절한 심경을 밝혔었는데요. 아버님의 소망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보는지요?

  현정권의 폭력성은 직접·간접으로 끊임없이 희생자를 낳고 있다고 봅니다. 같은 '구로구청농성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김병곤(당시 민통련 정책실차장) 선배라는 분만 해도 이 시대의 간접적인 희생자로 누구보다도 처절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요. 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토록 통증을 호소했는데도 진단 한번 제대로 못 받은 채 뒤늦게사 출감했는데, 이미 암세포가 손쓸 수 없이 퍼진 상태라서 병원에서도 포기한 상태예요. 가끔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지다가도 아직 어린 두 딸아이를 두고 시한부인생을 사는 그분을 뵐 때마다 반쪽이나마 육신이 성한 제가 그 몫만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곤 하지요.

 ● 아까 맨 첫머리에서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조건이 달라진 만큼 앞으로의 설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터인데… . 

  아직까지는 그냥 모색하는 과정이지만, 제 조건으로 가능한 건 아무래도 공부쪽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 공부는 자신을 위한 것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그런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 최근 현정권이 3당통합이다, 성장이 중요하다 하면서 소수의 가진자들과 기득권 층을 철저하게 대변하는 쪽으로 가면서 이 땅의 민중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세력들이 더욱 교묘한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민중들의 힘으로 그들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게 될 날이 오리라고 확신해요. 저에게도 그 과정의 아주 사소한 한모퉁이라도 함께 거드는 쓰임새가 있겠지요.

 

  고통의 연속이던 병상생활 속에서도 '분노‘보다는 '사랑'만 기억하려 애쓴 덕분일까, 아니면 워낙 천성이 곱고 따뜻하기 때문일까, 아직도 등근육 두줄기만으로 가슴 아래부분을 지탱해야 하는 그로선 오랜 시간의 대화가 상당한 고통일 수밖에 없을 텐데도 오히려 그는 이야기를 받아쓰느라 힘들겠다며 기자를 걱정해 주었다. 아무래도 '여자친구'문제를 상담하러온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휠체어를 굴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저질렀던 역사의 책임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도 잠깐. 그의 어머니의 하소연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누이 셋을 출가시키면서도 저 아이에게 양복 한벌 못해준 게 평생의 恨으로 남아요. 이젠 해주어도 양복 입을 일이 없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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