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빗길에 선 '신발繼濟'
  • 편집국 ()
  • 승인 1990.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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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해에 6억켤레의 운동화 생산능력을 갖고 있는 세계최대의 신발생산기지 부산. 신발업체가 몰려 있는 사상공업지구의 한 신발업체에선 르까프 브랜드 운동화가 다단계의 생산공정을 거친 후 세상에 나오고 있었다. 공장 한가운데선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고 스폰지, 고무약품 등의 배합작업을 하는 근로자, 신발밑창을 찍어내는 프레스 작업자 등의 분주한 몸놀림으로 작업장안은 부산하다. 

  그러나 이 작업장도 작년에 들어 부쩍 활력이 사그라진 상태다. 생산라인을 대폭 줄이거나 도산하는 군소업체가 속출하고 눈에 띄게 이직률도 높아져가고 있다. 87년부터 2년간의 급격한 원화절상과 고임금으로, 대표적인 노동집약· 수출의존적인 신발산업은 체질개선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부산=신발'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을 정도로 부산경제에서 차지하는 신발의 비중은 압도적으로 높다. 88년말을 기준으로 볼 때 생산액에서는 23.4%, 수출액으로는 40.3%이며, 종업원수로는 35.4%나 돼 부산사람 3명 중 1명 이상이 신발로 생계를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전체에서 부산 신발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엄청나다. 전국의 신발생산량의 81.3%가, 수출량으로는 85%가 부산지역에 집중돼 있다. 그래서 외국 바이어들도 신발하면 ‘코리아'보다 '푸산’을 떠올린다.

 

"사양산업 지목은 불합리한 것" 

  그러나 수출주종품으로 부산경제를 상징하던 신발은 지난해 3억4천만달러가 줄어든 28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는 데 그쳤다. 전국적으로는 35억6천만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 88년에 비해 2억4천만달러가 감소됐는데 부산지역 감소물량이 현저했음을 보여준다. (주)삼화, 국제상사, 화승그룹 등 8개 주요신발업체들은 생산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가동라인수가 지난해 말 현재 1천5백46개로 1년 동안 6개 라인이 줄었고 고용인원도 생산직에서 7천2백33명, 관리직에서 4백25명이 감소, 신발공장들은 완연한 봄기운과는 어울리지 않게 썰렁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부산은 신발· 섬유 등이 주력산업으로, 저부가가치의 낙후된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80년도 중반까지도 이들 업종들이 수출을 주도, 부산경제를 떠받쳐왔으며 아직도 우리 경제에서 갖는 비중으로 볼 때 무차별적으로 이들 산업을 사양산업으로 지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사상공업지구에서 만난 한 중소기업인은 "신발이 왜 사양산업입니까. 지난해 수출이 부진했지만 여전히 국내 4위의 주종품목입니다. 이제 와서 노동집약적이니까 저부가가치, 사양산업이라고 낙인찍는 것은 성급한 판단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주)화승의 한 관계자도 "신발은 기술수준에서 국제경쟁력을 갖고 있어 외화가득률이 어느 산업 못지 않게 높으며, 또 인간이 살아가는 한 신발 수요는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냐"고 강조했다. 

  한국신발연구소 閱丙權소장은 "신발을 사양산업으로 몰아 그동안 우리 경제에서 차지해왔던 비중과 잠재력까지 거세시켜버리면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신발 등 이른바 낙후산업들을 제거해내기보다는 이들 산업의 기술수준이 어느 정도의 국제경쟁력을 갖춘 상태이므로 고급화 등을 통한 첨단산업화가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물론 신발산업의 쇠퇴 징후는 외부적 악화요인과 함께 자체적으로 갖는 문제점이 돌출된 측면도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신발은 타산업처럼 외국기술 도입에 의한 산업형태가 아니라 나이키, 리복, LA기어 등 외국 유명브랜드사의 주문에 의한 하청산업 형태로서 이른바 OEM이라는 주문자상표 부착방식에 의한 것이 전체 수출물량의 97%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기술·가격·물량 등을 외국바이어가 좌지우지, 경영예속화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계속적 수출에도 한계로 작용, 제동이 걸린다. 또 이렇게 하다 보니 국내 브랜드가 개발될 토양이 척박할 수밖에 없었고 갈수록 더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단위공장시설 규모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도 문제다. 이는 대기업 위주의 성장우선주의가 자초한 측면이 크며 상대적으로 중소기업의 위축을 초래했다. 비수기에 수출단가 하락을 부르고 소량 다품종 생산에도 불리하며, 해외수요 및 생활패턴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신발연구소 朴原石과장은 "기술개발로 고부가가치로의 체질강화가 시급하다. 우리의 신발제조 기술은 숙련공에 의한 세계 일류수준에 이르고 있으나 소재 및 디자인 분야에서는 이탈리아 등 선진국에 비해 뒤져 있다. 따라서 제품의 고급화 및 일류화를 추진하기 위해 소재·디자인·공정자동화 등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확대, 고유브랜드를 개발하고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일만이 신발업계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부산 신발업계 종사자들은 녹산공단 예정지에 첨단산업단지를 조성,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재래산업인 신발 등의 확보된 우위를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정책이 추진돼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들어 신발업계의 자구노력으로 수주량이 크게 늘고 있는 등 회복기미를 보이는 현상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부산경제의 주력업종인 신발산업 등이 날로 원기를 잃어가 생활 밑바닥을 휘감고 있는 지금, 한마디로 부산은 점차 먹고살기 어려운 도시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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