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적 證市 이번엔 ‘실명제 타령’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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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검은돈’ 이탈 이유로 연기 주장… “장기적으로 건전화 촉진” 강한 반론도

지난달 26일, 재무부 회의실에서는 금융실명제가 또 ‘失明’의 운명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증시침체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증권유관기관들은 금융실명제가 침체증시를 만든 제1원인이라고 지목, 연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증시 주가는 지난해 ¼분기를 고비로 지금까지 만 11개월 동안 지지부진한 하락과정을 밟아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지난달 26일의 장세는 88년 12월 이후 최저점을 찍어 증시파동이라는 위기감마저 고조, 금융공황이 오지 않겠느냐는 성급한 우려도 등장했다. 결국 지난 2일에는 신규 기관투자가 지정확대, 증권주 신용융자허용 등을 골자로 하는 안정화대책이 증시에 뿌려지기에 이르렀으나 주가는 이 조치 발표 이틀전부터 안정화조치 발표까지 무려 50포인트까지 치솟다가 다시 8백40포인트(8일현재)대로 가라앉는 무력함을 보였다. 또 지리한 엎치락뒤치락의 조정국면에 들어간 것이다.

지난해 4월부터의 내리막 주가형성의 원인으로 증권업계는 수급불균형, 기관투자가의 증시안정능력 미약, 경제상황 침체, 금융실명제 등을 지목하고 있다. 엄도명투자경제연구소 嚴道明소장은 “증권당국이 자본자유화에 대비, 금융산업 육성을 목표로 증권주와 은행주 증자를 지난 한해 동안 무려 8조원이나 허용했다. 수요는 크게 늘어날 수 없는 한정된 상황에서 공급량이 급격히 늘어나니 주식의 가격인 주가가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수급불균형이 증시침체의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는 계수상으로 88년 7조7천7백억원이었던 신규 주식공급량이 지난해엔 14조6천7백억원으로 2배 가까이나 늘어나 수급불균형 심화를 뒷받침해준다. 기관투자가의 증시 안정능력이 약한 것이 침체상을 불렀다고 보는 이도 많다. 쌍용경제연구소 오동휘소장은 “시장안정을 도모해야 할 기관투자가들의 주식소유비율이 적고(사업법인 제외시 20%) 단기매매에 치중, 매매회전율이 높아 ‘팔자’가 쏟아진 장세를 떠받치기엔 역부족이었다”고 진단했다.

‘실물경제의 거울’이라는 증시의 구조상 주가가 부진한 경기상황을 민감히 반영해낸 요인도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수렁에 빠진 증시를 건져올리기 위한 당국의 대책이 적절치 않았다는 지적도 많다. ‘돈 풀어 증시를 떠받치겠다’는 발상은 증시 회복은커녕 물가불안만 가중시키는 부작용을 불렀기 때문이다. 이때 투신의 주식매입에 때맞춰 상당수의 대주주들이 위장분산주식을 털고 빠져 나갔는데 이를 방치한 책임도 궁극적으로 당국에 돌려진다는 것이다.


假·借名 구좌의 돈 약 10조원

이같은 증시침체 요인은 ‘3·2조치’로 상당 정도는 개선될 전망이다. 우선 과다한 공급물량도 지나해 후반기부터 유상증자 물량조절, 기업공개 여건 강화 등으로 수급을 조절하고 있으며 기금 및 공제단체 31개를 새로이 기관투자가로 지정하고 3억달러 규모의 혼합투자펀드(매칭펀드) 설정으로 수요여력을 대폭 신장시켰기 때문이다.

최근의 추가 증시안정화대책이 나옴으로써 침체증시가 회복될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증권업계나 투자자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온 요구사항은 거의 다 정부가 들어준 셈이다. 단 하나 이들이 아쉬워하고 있는 사안은 금융실명제이다. 증권감독원 鄭煥喆 시장관리국장은 “금융실명제의 당위성은 인정되나 부동산투기를 잡지 못하는 현 상황에선 10조원으로 추산되는 이들 假·借名구좌의 돈들이 대거 증시를 이탈할 공산이 크다. 이미 지난 연말부터 이탈행진은 가시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검은 돈’들이 급속히 빠져나가게 되면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고 이는 가뜩이나 어려운 증시를 파탄 직전으로 몰고갈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증권업계는 지난 연말의 엄청난 주식매도세력 중 상당부분은 실명제를 의식한 대주주 위장분산 물량임이 확실하며 이는 증시침체를 더욱 부추기는 요인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이는 가시적으로 나타난 사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증권업계가 최근 금융실명제가 마치 증시침체의 ‘제1의 원흉’인 것처럼 주장, 연기를 건의한 것은 선의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증권업계는 그동안 각종 투자정보 자료에서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실명제를 ‘악재’로 꼽아왔으나 적극적으로 대처, 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대우경제연구소 李漢久소장은 “실명제의 도입은 우리 증시의 고질병인 내부자 거래를 어렵게 만들고 정확한 외부감사 및 기업공시 촉진을 통해 공정거래 풍토를 조성시킬 것”이라고 증시에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동양투자자문 李康千이사도 “증시의 정상적 흐름과 안정화, 건전한 투자분위기 정착에 큰 몫을 해낼 것”으로 분석, 실명제에 대해 과도한 우려는 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들의 진단처럼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 견해들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 실명제연기론을 증권유관기관들이 강도 높은 목소리로 제기한 것은 어떤 목적을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들은 증권업계가 바라는 제1의 목표는 실명제의 무기한 연기나 폐지이며 두 번째는 주식매매차익에 대한 과세는 하지 않고 실명제만 실시하자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도저도 여의치 않을 경우 주식에서 얻는 이득에 대해 여타 금융소득과 합산 과세하느냐, 분리과세하느냐에 증권업계는 촉각이 곤두서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식소득이 여타 금융소득과 분리과세될 경우 위장 분산지분이나 借名구좌 보유주식이 시장에 매각될 이유가 없는 데다 부분적으로는 거액의 금융자산 보유자의 주식매입도 촉진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실명제 연기 주장 움직임은 스스로 자살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난도 들끓고 있다. 서울대 鄭雲燦교수(경제학)는 “증시 침체의 원인을 금융실명제에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주가하락의 근본원인은 지나치게 부푼 기대에 못미치는 경기상황과 공급과잉에 있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주가는 오를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지만 침체상황을 끌어올려야 한다면 문제해결은 실명제 연기보다는 증권수요 진작에 있다. 또 보다 넓은 안목에서 보면 실명제로 인한 증시건전화가 기대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증권업계가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 대세를 그르치는 주장을 해서는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난해말 현재 금융자산의 실명화율은 98.4%(금액기준)에 달해 2조4천억원의 돈만이 비실명상태에 있다. 증권의 경우는 실명화율이 조금 낮아 96.4%(30조8천억원)로 나머지 3.6%의 비실명금액을 보호하는 듯한 최근의 실명제 연기 주장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물론 가명구좌나 위장분산계좌로 추산되는 ‘검은돈’ 8~10조원의 증시이탈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가뜩이나 보완사항이 많을 것으로 예상돼 금융실명제가 ‘실명’될 우려가 높은 상황에서 정황이 좀 유리하다고 ‘발등의 불이나 끄려는’ 식의 대응자세는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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