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 張起呂 박사
  • 박준웅 편집위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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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문제는 정치인 탓”



42년 동안 가족 상봉의 날만을 기다려 온 張起呂 박사(82)는 이번 추석이 다른 어느 때의 명절보다도 우울하고 가슴 아프다. 남북 당국에서 8·15 고향 방문사업을 추진한다며 헤어진 가족들을 금세라도 만나게 해줄 것처럼 떠들어대다가 하루 아침에 이를 무산시켜 버리는 바람에 재회의 길은 막막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여름 북한에 두고 온 부인과 5남매의 건강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편지를 전해받은 터라 이들에 대한 그의 그리움은 더욱 절절하다.

장박사가 월남한 것은 지난 50년 12월3이었다. 포탄이 쏟아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둘째 아들(家鏞씨·서울의대 해부학 교수)만을 데리고 후퇴하던 국군트럭에 탄 것이 40여년의 기나긴 이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남하후 42년 동안을 독신으로 지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어 봉사와 헌신의 외길을 걸어온 그는 8순을 넘긴 요즘도 매일 청십자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박사로부터 이산가족으로서의 감회와 최근의 세태를 들어본다.

8·15때 남북 이산가족의 고향방문이 이뤄지나 했는데 또 다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산가족의 설움이 가장 절실하실텐데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이산가족들이 서로 만나려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당연한 바람이지요. 그러나 7년 전인가 맨처음 시도했던 이산가족 상봉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갔다 온 사람들로부터 좋더라, 기쁘더라 하는 말은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어요. 뭔가 잘못된 것이지요. 이번에도 또 그렇게 되는 것 아니냐고 사실 큰 기대를 안했어요. 정치하는 사람들 손아귀에 들어가 가지고 하는 것이니 하등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무산되리라고 예견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라도 길이 트여서 점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면 성공 아니냐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요.

방북신청을 하셨던가요.

90년 8월8일엔가 신청을 해서 번호를 가지고 있어요.

왜 이렇게 서로 갈라져서 40년이 넘도록 동족끼리 만나지 못하고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민족으로 함께 살려는 마음이 적어서 그렇지요. 왕래가 제대로 됩니까. 편지를 마음대로 쓰게 합니까.

어떤 집단이나 세력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정치하는 사람들이지요. 종교적으로 말하면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 때문입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이란 사탄, 바로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 화합하며 살라고 했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떼어놓고 이간질하려는 세력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가고 있어요.

지난해에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지자 이산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이 흥분하고 큰 기대를 걸었지요. 그런데도 아무런 진전이 없고 국민들은 실망만 하고 말았습니다. 남이나 북이나 통일과 이산가족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정치가들은 자기들이 바로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첫째로 진실해야 하고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또 서로 협동해야지요. 진실 사랑 협동 이 세가지 방향으로 나아가야 이 사회가 바로 잡힙니다.

북쪽이 대화를 결렬시킨 이유 중의 하나가 장기려 박사는 미군에 의해 납치되었으니 돌려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향의 가족을 만날 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박사님을 구실로 삼은 것은 무척 역설적입니다.

이북의 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해서 내가 자의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미군에 의해서 납치된 것이라고 했다는데 우리 가족 중에 그렇게 말할 사람이 없어요. 내가 내 발로 떠나 왔는데 그렇게 말할 리가 있나요.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도 경제도 모두 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욕심 대문에 그렇지요. 모두 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게 끌려 다니며 자기 앞만 챙기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어려움을 치유할 처방은 무엇입니까.

자기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이겨야 합니다. 불교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며 살면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요즘 기독교를 어떻게 보십니까. 교회의 비대화 물질화 세속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데요.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문화도 다 잘못돼 가고 있는데 여기엔 기독교의 책임도 있어요. 기독교가 잘못돼서 사회가 잘못됐다고도 할 수 있어요.

최근에는 종말론이라는 게 나와 많은 사람들이 이에 빠져들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 말씀에는 그렇게 돼 있지 않습니다. 언제 오실지 때를 모른다고 했지요. 그러니 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지요.

작년에 부인과 자녀들의 사진과 편지를 받으셨지요? 소식을 알고 나니까 가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절실해지지 않습니까.

하늘나라에서 만날까 생각하고 지금껏 살았지요. 소식을 안 다음부터는 ‘살아서 만날 가능성이 있구나’하고 기다리게 됐지요.

중국의 연변 같은 곳에서 비공식적으로 가족상봉을 주선해주는 경우도 있다던데요. 그런 제의를 받아 보셨습니까.

그런 얘기가 있길래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애들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거든요.

1·4 후퇴 때 둘째 아드님(서울대 의대 교수)만 데리고 내려오신 뒤 재혼을 안하시고 오직 인술만을 베풀며 살아오셨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역시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처음에는 2~3년 있다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요. 결혼할 생각은 통 안했어요. 그것이 신앙적이라면 신앙적이지요. 성경말씀에 결혼은 한번 해라, 그리고 결혼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라 했습니다. 이북에서 아내와 함께 살 때 육신의 사랑이 아닌,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어요. 사랑은 영혼의 샘이지요.

통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와도 통일돼 있거든요. 저는 김일성을 데려가라 기도하지 않습니다. ‘김일성을 회개시켜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지요. 김일성을 회개시키면 그날로 좋은 세상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가면 통일된 세상이 됩니다.

문익환 목사나 임수경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인의 신앙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분들이 통일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했다면 비판 못하지요. 그러나 이 사회에 살면서 사회의 규율을 초월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되겠지요.

요즘 의사들은 인술을 떠나서 돈만 알거나 편한 일만 찾는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요.

20~30년 전부터 그런 소리들을 듣지요. 가톨릭대학에 있을 때인데 강의를 끝낸 뒤 학생들에게 어떤 의사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지요. 그런 일은 별로 생각지 않았는지 아무도 대답을 안해요. 그래서 여러분의 부모들은 어떤 의사가 되기를 바라느냐 물었더니 잘 되기를 원한다고 대답해요. 그게 부귀영화, 바로 돈과 직위와 명예를 바란다는 것이지요. 그래 내 자식이 서울대 해부학 교수로 있는데 나는 그 애에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 말한다고 학생들에게 얘기했더니 알아듣는지 못 듣는지 역시 아무도 더 이상 묻지를 않아요. 부귀영화 외에는 관심 밖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사회를 위한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는 사람도 꽤 있어요. 돈 버는 의사 임상의사 말고 예방의학이나 기초의학 또는 행정쪽에서 사회개량을 위해 일하는 의사도 많아요. 또 의사도 힘들 때가 많지요. 서로 이해하고 동정해서 보면 의사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의사가 되신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진학을 하려 할 때 가세가 기울어 학비가 적게 드는 학교를 택하다 보니 경성의전엘 가게 됐습니다. 그때 ‘의사가 되게 해주신다면 의사를 한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마치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 덕분에 무사히 합격했지요. 그리고 의사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이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어요.

의사로서 보람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월남 후 부산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던 중 51년 6월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 영도에 있는 제3교회에서 복음병원을 열었고 곧이어 영선국교 옆 빈터에 천막을 치고 환자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치료비를 받지 않아서인지 연일 환자들이 줄줄 이었는데 어떤 날은 金鍾暉박사(당시 서울대 의대 교수)와 함께 2백명 이상을 진료했어요. 또 한달에 한번씩 무의촌 진료도 나섰습니다. 이 병원이 모태가 되어 현재 송도의 고신의과대학병원으로 된 것입니다. 지금은 16개 진료과목에 7백50개 병상을 가진 종합병원이 됐습니다. 또 한가지 보람 있었던 것은 거리에서 죽어가는 행려병자들을 돌봐준 일입니다. 59년에 일산산부인과 원장 메킨지씨 등과 함께 기독의사회를 조직, 행려병자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벌였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부산시에서도 행려병자 가료시설을 만들어 대학병원 의사들로 하여금 돌보게 했지요.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 10년 전에 부산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성경공부를 함께 하는 ‘부산모임’이란 것이 있었는데 사회운동가 蔡奎哲씨가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비 걱정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보자고 제의해 68년 봄에 태동된 것입니다. 부산시내의 1백여 교회에 편지를 냈는데 23개 교회에서 찬성을 해와서 조합원 7백명으로 시작했지요. 담배 한갑에 1백원 할 때인데 한달 회비로 60원씩 받았습니다. 복음병원을 지정병원으로 하여 무료이다시피 봉사했는데도 이 조합의 한달 쓸 돈이 1주일 만에 바닥났어요. 그밖에도 어려움이 무척 많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74년부터는 흑자살림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청십자 의료공제회로 개편됐습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라는 점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한의학회 학술상 국민훈장 막사이사이상 등을 받으셨는데요.

꼭같은 상을 자꾸 받으니 마치 도깨비가 주는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나중엔 이 세상의 상은 틀렸다, 살면서 상 받는 것은 좋지 않다, 정말 좋은 일은 죽은 뒤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마지막 상은 거절하고 받지 않았어요.

여든이 넘으셨는데도 퍽 건강해 보이십니다. 요즘은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6시쯤 일어나서 7시에 나를 돌봐주는 사람하고 간단히 예배를 보고 8시30분에 청십자병원에 출근하지요. 9시부터 환자를 보게 되는데 12시까지 평균 40명쯤 돼요. 일흔다섯 이후부터는 수술은 안하고 주로 신경성 환자를 봅니다. 점심 먹고 잠깐 쉬다가 청십자 사회복지 이사장으로서 1시30분까지 일을 봅니다.

후진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경건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공부할 때 보다 인격적으로 경건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 책임을 잘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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