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법치주의의 길
  • 박권상 (편집고문)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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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따라야 할 재판관이 정치 권력의 눈치만 보고 좌고우면하고 있으니 비루하고 창피한 일이다.”

법을 ‘거미줄’에 비교하는 사람이 이TEk. 약한 자는 영락없이 거미줄에 걸려든다. 그러나 강한 자는 유유히 뚫고 나갈 수 있다. 법이란 예로부터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 할 말이 없다. 법을 정의라고 믿고 정의롭게 집행하는 세계도 물론 있다. 법치주의 사회,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법은 국민의 일반 의지가 집약된 것이고,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고, 법은 누구나 지켜야 한다.

 우리의 경우 지난 5년간 민주화의 나팔소리는 요란했지만, 법이 과연 국민의 일반 의지를 집약하여 만들어진 것인지 의심스럽고 곧이 곧대로 지키는 사람이 손해보는 세상, 그러기에 법을 우습게 생각하는 풍조가 미만하고 있다.

 나는 얼마 전 어느 택시기사한테 “왜 붉은 신호인데도 택시와 버스가 그냥 가는 거죠”라고 항의성 질문을 던진 일이 있다. 이른 아침에 시내 운전을 하다보면 택시와 버스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것을 흔히 목격하는데, 요즘은 교통이 빈번한 대낮에도 가끔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어 택시를 탄 김에 물어본 것이다.

 그의 답변은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있는 사람들과 높은 양반들, 심지어 대통령도 법을 어기는데 우리 졸개들만 법을 지켜요. 그래 법대로 해서 밥 먹을 수 있다고 보세요?”

 

“대통령도 법을 어기는데 왜 우리만 법을 지킵니까? 나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니까. ”上?下不?“이라는 원칙은 불변의 진리이다. 대통령이 스스로 공포 서명한 법을 막무가내로 실시를 거부해도 되는 세상이다. 국회가 충분한 토론없이 33초에 26개 법안을 통과했다고 선포 해서 그것이 법으로 공포되어도 괜찮은 나라다.

 어디 그뿐인가. 법을 해석하고 판결하는 사법부조차 피고인의 강약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를 이따금 볼 수 있지 않은가.

 89년4월 동해시에서 있었던 보궐선거는 타락의 극치를 이룬 것으로 역사에 길이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당시의 민주당 사무총장 서석재 의원은 공화당 후보를 매수, 사퇴시키려다 발각되어 구속되었다.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었다. 1.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아직도 대법원에 계류증이다. 서씨는 지난 봄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민자당 후보를 물리치고 가볍게 당선된 후 민자당에 입당해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 대법원도 강한 자 앞에 맥을 못 쓰는 것 같다.

 대조적으로 이학봉 13대 의원의 경우, 대법원이 서둘러 유죄판결 함으로써 14대 국회에 나갈 수 이TSms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였다. 이씨는 80년초에 막강한 권력을 누렸지만 5공 청산 과정에서 힘없는 자가 되었다. 인생무상이라 할까. 법은 가차없이 힘의 강약에 따라 변덕을 부린다.

 지난 3.24총선거 막바지에 안기부 대공수사국 한기용 사무관등 4명이 야당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 유인물을 뿌리다가 야당 선거운동원에 붙들린 사건이 있었다. 국가의 정보 기관이 직접 선거에 간여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검찰당국은 배후 세력 등 사건의 핵심을 전혀 밝혀내려하지 않았다. 그나마 지난 5월 초에 열렸던 재판은25분 만에 사실심리와 구형까지 끝낸 초스피드.“친구의 부탁”으로 흑색선전물을 살포했다는데 문제의 핵심인 ‘친구’의 실체를 추궁하지도 않고  밝히려는 lshfur도 없었다. 검찰이 권력의 눈치르 f본다는 것도 부당한 것이지만, 3권이 엄연히 분립된 사법부의 재판관까지 잘 짜여진 각본대로 연출하는 인상을 주었다. 2주일 후에 있는 결심공판은 단5분 만에 끝났고 집행유예라는 은전으로 모두 풀려났다. 법은 절대로 정의가 아니었고 법은 아직도 강자의 것임이 입증되었다.

 

각본대로 움직이는 사법부인가

 그것은 헌법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인 헌법재판소에도 해당되는 현실이니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금할 길이 없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이 6월말 이전에 실시해야 할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위헌 확인 소송인데, 현재는 이렇다할 이유 없이 심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이유는 ‘불문가지’이다. 법에 명시된 장선거인데 대통령이 실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명백히 헌법 위반이요 법치주의의 유린으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으나, 대통령이 한 일이고 또한 정부 여당에 대한 정치적 불이익이기 때문에 질질 시일을 끌고 정부가 제출한 지자제법 개정안을 빨리 통과시킴으로써 위헌 시비 그 자체가 정치적의미를 잃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한심스럽다. 명색이 헌법 기관이고 임기가 보장된 재판관들인데, 그리고 그들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것이 법률적 보장을 받고 있는데 이렇듯 정치 권력의 눈치만 보고 좌고우면하고 있으니 정말 비루하고 창피한 일이다.

 여기서도 법은 힘 잇는 사람의 편이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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