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金 결별
  • 이흥환 기자 ()
  • 승인 2006.04.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개에 묻힌‘대선구도’




 과반수가 채 안되는 36.6%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으며, 소수 정파의 리더였던 민주계 金泳三 대표에게 차기 대통령후보 자리를 넘겨주었던 盧泰愚 대통령이 보따리를 챙겨 민자당을 훌쩍 떠나 뉴욕으로 날아가버렸다.

 점입가경. 대통령선거를 3개월 앞두고 민자당을 또 한번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궁금증은 더해진다.  참고 견디는데는 일가견이 있다는‘노심’도 마침내 ‘이판사판의 정치보복’을 선택한 것인가.  김영삼 총재는 끝내 끈 떨어진 갓 꼴이 되고 마는가. 김총재를 대통령후보로 밀었던 민정계 인사들은 어디로 가는가.  노대통령 직계 민정계 의원들도 노대통령을 따라 대거 탈당할 것인가. 朴泰俊 최고위원의 미소 속에 담긴 뜻은 무엇인가.  朴哲彦 의원 사무실에 민정계 의원들의 전화가 쇄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태우의 보복이 시작됐다”

 노대통령의 민자당 당적 이탈은 ‘결별정국’의 서곡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태연한 척하던 김총재 측근들도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기 시작했고, 이와는 정반대로 청와대 비서진과 민자당 민정계의 일부 인사들은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김총재가 보여준 정치행태에 잔뜩 불만을 가졌던 청와대와 민자당내 인사들 사이에서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막판 대역전 드라마까지 상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상대는 승승장구해온 김영삼 후보다.  결코 만만치 않다.

 김총재와 측근들은 노대통령이 당적 이탈과 중립내각 구성을 결심하기 직전까지 노대통령의 탈당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난 18일 김총재는 노대통령과 사전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개각 명단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갔으나 노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노대통령은 사전에 일언반구 말이 없다가 김총재를 만난 자리에서 민자당을 떠나겠다고 했다.  김총재는 “명예총재직은 사임하더라도 당적은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떻겠느냐”하고 건의했으나 노대통령은 “나는 이제 여도 야도 아니다”라면서 이마저 묵살했다.  노대통령과 김총재 주변 인사들의 표현대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태우가 아닌 불태우의 보복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현역 대통령이 대선을 앞둔 채 소속 정당에서 탈당한 것은 임기 후 개인의 입지 보장을 위한 정략적 판단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없지 않으나, 당적 이탈과 중립내각 구성은 국민 정서를 감안할 때 노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라는 평도 있다.  노대통령에게 가장 이로운 선택이 김영삼 대통령후보에게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정치상황이야말로 현 여권의 왜곡된 권력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역대 집권당의 대통령선거는 관권이라 부르는 행정력과 정당의 힘으로 치러졌다.  노대통령의 민자당 탈당과 중립내각안은 결국 철옹성 같은 이 두가지 여권 프리미엄을 없애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선거를 치러야 할 김영삼 후보의 ‘양팔’을 끊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대통령이 김총재에게 ‘결별’을 선언한 게 아니냐 하는 말이 나올 만하다.  노·김 갈등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연기군 관권선거 사건은 두 사람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두 사안에 얽힌 막후 전개과정은 현역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 간의 갈등과 불신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盧心은 金心을 믿지 않는다.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은 여권의 속성과 청와대의 행정관례로 볼 때 뒤바뀔 수 없는 사안이었다.  오전에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발표하고, 같은 날 오후의 노·김 회동에서 김 총재를 설득하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는 게 청와대의 판단이었다.  이통 사업자 선정 발표 직후 노대통령과 김총재는 청와대 주례회동 자리에서 이통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으며,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달라”는 노대통령의 제안에 김총재가 수긍, 이통 문제에 대해서는 외부에 일절 거론하지 않기로 서로가 약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례회동이 끝난 후 “언론에 어떻게 발표하면 좋겠느냐”는 청와대 金重權 정무수석의 물음에 김총재는 “알아서 해라. 이통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응답했으며, 김수석은 이를 그대로 수용해 발표했다.  사태는 이튿날 뒤바뀌었다.  강릉으로 가던 차 안에서 김총재는 서울에 남아 있던 吳仁煥 정치특보를 카폰으로 불러내 “어제 청와대 회동에서 이통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 발표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반격을 개시했다.  힘의 균형을 깨버리는 정치적 순발력과 뚝심으로 김영삼 총재는 사업자 선정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黃秉泰 전 의원이 선경 崔種賢 회장에게 최회장과 시카고대학 동창인 李承潤 의원을 보내 막후 교섭을 하는 등 민주계 참모들이 활약하여 이통건은 3당 통합 이후 김총재의 ‘최대 걸작품’이라는 평을 받았고, 반대로 노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진은 역습을 당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노대통령은 이때까지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김후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청와대측의 이런 상황 설명을 김총재측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김 불화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은 연기군 관권선거와 관련된 민자당 연기지구 당 위원장 林栽吉씨의 구속이다.  사건 직후 임위원장은 김총재측의 위원장 사임 압력에 “위원장직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티었으나 결국 구속되었다.  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을 지낸 임위원장은 노대통령을 20년 가까이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보좌했고, 노대통령 가족과는 한집안 사람처럼 지내는 막역한 사이인 데다가, 노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탓에 그의 구속은 ‘노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이 정계 인사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야당에서조차 “임위원장을 구속한 것은 김총재측이 용의 비늘을 건드린 셈”이라고 말할 정도이며, 노대통령과 노대통령 가족도 ‘우리도 임위원장처럼 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김총재에 대한 신뢰성을 문제삼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개각 문제가 두 사람 사이에 내연하던 불화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이동통신과 연기군 관권선거 사건으로 2전2승을 거두면서 단독 질주하던 김총재는 “현직 대통령의 인사권마저” 넘보게 된다.

 추석 연휴 직후인 지난 14일 오후 2시 김총재는 삼청동 안가에 잠깐 들렀다가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는데, 丁海昌 대통령비서실장과 김중권 정무수석에게 “안기부장과 내무·체신부장관을 교체한다”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연기군 사건에 뒤이어 김총재 특유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의 정치행태가 유감없이 발휘된 자리였으며, 이로써 ‘노심’을 또 한번 자극한 셈이다.

 

격변 조짐…민주계 갈수록 심각

 일부 정가 인사들은 정해창 비서실장의 아이디어로 알려져 있는 노대통령의 민자당 탈당 내용을 담은 金學俊 대변인의 발표문이‘거칠다’는 지적을 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마련한 것이 아니라 서둘러 준비한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개각건으로 또 한번 자극받은 노대통령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보복’을 개시한 게 아니냐 하는 분석이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노대통령의 탈당 발표가 있자마자 김중권 정무수석이 민주당에 전화를 걸어 당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서둘러 민주·국민 양당을 찾은 것도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고 지적했다. 짬을 두지 않고 전격적으로 야당에 중립내각 구성안을 통보하면서 공개된 자리에서 설명을 곁들인 것은, 김영삼 총재가 끼여들 시간 여유를 주지 않으면서 공정선거를 위한 중립내각안이 청와대‘작품’임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탈당 발표 직후 민자당은 당보인 <민주자유보> 호외를 대량 제작해 노대통령의 당적 이탈과 중립내각 구성안이 노대통령과 김총재의 합작품인 것으로 홍보하고 있다.

 노·김의 균열은 3개월 앞둔 대통령선거 양상을 통째로 바꿔버릴 수 있다. 이미 민자당 내에서는 박태준 최고위원과 박철언 의원을 비롯한 민정계 의원들의 대거 탈당설이 나돌고, 심지어 김·최·이 아무개 의원 등 노대통령 직계 인사들이 의원 50여명 확보를 목표로 포섭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이들은 “김총재로는 곤란하다. 퇴임 후 노대통령은 우리가 보호한다”는 입장이며, “김영삼씨를 민자당의 차기 대통령후보로 밀었던 것은 민정계의 집단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판단아래 범여권을 대상으로 하는 제3세력의 태동 가능성을 공공연하게 거론하고 있다. 박철언 의원의 민자당 탈당이 기정사실화되면서 민정계 의원들이 다시 박의원을 접촉하기 시작했고, 민정계 관리자인 박태준 최고위원의 거취에 이목이 집중되는 등 민자당 내에서는 격변의 조짐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

 집권당의 도움 없이는 노대통령이 임기말을 편안하게 보낼 수 없다는 논리로 노대통령의 탈당을 애써 가볍게 여기려는 민주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고 있다. “노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있는 사이에 민자당은 쑥밭이 되고 말 것”이라는 한 소식통의 전언이 과연 얼마나 적중할지 두고 볼 일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