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의 ‘사회학 박사’ 배짱으로 20년 외길
  • 뉴욕·김동선 편집부국장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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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친선협의회 만든 김원덕씨



 뉴욕 한인 사회에서는 그를 ‘할렘의 흑인 대부’라고 부른다. 특히 고국에서 뉴욕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소개될 때 그에게는 언제나 이 별명이 붙는다.

 ‘할렘의 한인 흑인 대부’라는 별명은 얼핏 사회운동가나 종교 지도자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다. 그는 할렘의 중심지인 아폴로극장 건너편에서 20여년 동안 Guy & Gal이라는 옷가게를 경영하는 상인이며, 중퇴 학력이지만 술자리에서 "나는 사회학 박사“라며 너털웃음을 웃는 배포 좋은 사나이이다.

 金元德씨(57). 69년에 미국에 이민했고, 74년부터 흑인 밀집 지역인 할렘에서 옷가게를 경영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범죄 소굴의 대명사인 할렘 중심가에 들어가 옷가게를 차린 배경은 무엇일까. “69년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을 때 호주머니에는 단돈 30달러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에 먼저 와 살던 처남이 걱정하지 말고 오라고 해서 거의 맨몸으로 온 셈이지요. 그후 처와 함께 온갖 잡일을 다하며 살다가 이곳에 가게를 차렸습니다. 할렘지역은 뉴욕의 어느 곳보다 가게 세가 쌌고, 그때까지는 어느 교포도 발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개척한다는 마음으로 한번 부딪쳐 보기로 한 것이지요.”

 30달러 가지고 이민은 결행한 것이나, 말만 들어도 으시시한 할렘 중심가에 뛰어든 점 등은 김원덕씨의 개성을 잘 나타내준다. 한마디로 배짱 좋은 남자이다.

 그는 6·25 직전에 부모를 연달아 잃고 고아가 됐다. 그후 그가 어떤 인생 행로를 걸었는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60년대 서울 뒷골목에서는 그의 이름 석자가 통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주먹 세계에서 손을 씻기 위해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어쨌든 이 인생 경험이 그를 할렘에서 장사로 성공한 한인 교포가 되게 했고, 나아가서는 오늘의 한흑친선협의회 활동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가 농담조로 ‘사회학 박사’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 대해 정통하다는 의미이다.

 “어느 민족이고 완전한 민족이 없듯이 흑인들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일부 나쁜 흑인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대하면 안되지요. 또 동양인들의 표정이 딱딱하니까 그들이 보기에는 그같은 표정이 자기들을 멸시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장사하면서 이 세상에 나보다 못난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가 할렘에 발을 붙일 때만 해도 흑인들은 이 낯선 동양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인 상가가 30여곳 정도로 늘어나자 그들은 경계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81년에 할렘한인상인번영회를 조직해 흑인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불우 흑인과 가난한 학생을 위해 모금을 했고, 흑인 목사들과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 활동이 모체가 되어 90년에는 한흑친선협의회를 출범시키며 초대 회장이 됐다. 그는 “한국인이 그들에게 필요한 이웃이라는 점만 인식시키면 한흑 갈등은 없어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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