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경제석학의 ‘신국제경제질서’ 진단
  • 편집국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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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직전과 너무 닮았다




 모든 세대는 자기세대가 갖는 특이한 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붕괴는 분명히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 틀림없다. 70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은 근본적으로 철학을 달리하는 상이한 두 경제체제의 투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미국의 지도력 밑에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로 뭉쳤을 만큼 냉전은 지독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경제거인'인 북미·유럽·일본에 있어 냉전시대의 종식은 엄청나게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은 그 중요성이 점차 줄어드는 군사력을, 한때 세계경제를 독점했던 자신들의 경제력으로 대치할 수도 없게 되었다. 비록 미국경제가 73년 이후 유럽보다는 조금 빨리 성장해왔고, 미국에 대한 일본경제의 월등한 성장률도 60년대보다는 다소 진정되었지만, 80년대는 미국경제가 약화된 대표적인 시기로 인식되고 있다(이 기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1.7%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거대한 채무국으로 전락했다(89년도 시장가격으로 채무액은 총 3천억달러에 달한다). 지난 70년대에는 공산품 수출의 약 7분의 1에 해당했던 해외로부터의 투자이익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세계경제 국제화 수준 높아지지 않았다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치도 크게 위축되었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 외환보유고에서 미국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73년 초반에는 78.4%였으나 90년 말에 와서는 56.4%로 떨어졌다(이 기간에 독일 마르크의 비중은 5.5%에서 19.7%로 증가했고, 일본 엔화의 비중은 0%에서 9.1%로 뛰어올랐다). 세계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이 이 기간 동안 추락하는 달러의 가치하락을 막기 위해 달러를 적극적으로 매입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실질적인 미국 달러의 가치하락은 나타나는 수치보다 훨씬 크다.

 이제 분명해진 하나의 사실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던 미국의 독점적인 위치도,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유진영의 국가들이 하나로 뭉쳤던 시대도 모두 끝났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미국의 지도력 상실이 문제될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단일한 지도력없이도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적 통합이 국가 간의 조화로운 협조를 이끌어낼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필자는 신국제경제질서에 대한 논의는 바로 이러한 믿음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면밀한 검토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후 세계의 무역량은 그 생산량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해왔다. 이러한 사실은 대부분의 공산품이 국제적인 무역거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 무역량의 증가율은 항상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해보아야 할 성질의 것이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들의 수출량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따져볼 때,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무역의 자유화가 가장 앞서 실현되고 있다는 유럽공동체 내에서조차도 80년대 말까지 수출비중은 1913년보다 조금 높았던 정도에 불과했다. 중남미와 아시아의 경우를 보더라도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13년 이전보다 결코 높지 않다. 따라서 50년대 이후 상대적인 무역량의 급속한 증가는 단지 그 이전 40년 동안의 무역량 감소추세를 만회해간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세계경제는 국제화의 새로운 질적 수준으로 한 계단 올라선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런 충격적인 결론은 지금 경제개발협력기구국가 국내총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서비스가 현재 지극히 제한적인 수준에서 세계적으로 교역되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세계 무역량의 증가를 억제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관세인하를 위한 국제적 노력이 한계에 도달한 반면, 상대적으로 비관세 장벽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는 것이다. 경제개발협력기구는 최근 호주 일본 뉴질랜드 터키만이 "80년대를 좀더 자유화된 무역정책으로 마감한 나라"로 평가한 바 있다.

통합유럽, 역외 국가에 배타적일 가능성

 전후 세계경제에서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고 있는 하나의 현상은 외국인 직접투자를 통해 생산이 국제화되는 추세이다. 50년대에 외국인 직접투자는 지극히 저조했으나, 미국에서는 60년대에 국내 투자총액의 10~15%에 해당하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이루어졌다. 독일은 70년대에, 일본은 80년대에 와서 60년대의 미국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했다. 무역은 물론 투자에서도 미국 유럽 일본은 각기 제3세계에 자기의 위성지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중남미를,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유럽은 아프리카·중동·옛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을 투자와 교역의 제1순위 지역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 연대현상은 우려되는 세계경제의 지역화 경향과 근본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주요 경제블록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일 것이다.

 유럽·미국·일본 사이의 무역량과 투자액을 보여주는 통계(오른쪽 표 참조)를 보면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현재 주요 경제블록 간에 이루어지는 교역과 투자는 놀라울 정도로 작은 규모라는 점이다. 유럽국가들의 해외투자와 무역량 중 대부분(약 3분의2)은 유럽국가 상호 간에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주요 경제블록들이 무역과 투자에서 상호의존적인 상황에 있다고 믿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세계경제가 실질적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생각 역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엄청난 '금융' 자본의 흐름을 보고 사람들은 세계경제가 '실질적'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환상에 쉽게 빠진다. 경제사학자 로버트 제빈은 최근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자본시장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세계 자본시장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통합되어 있다."

 통합유럽은 통화의 단일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경제현실을 상당히 앞질러 가고 있다. 영국과 같은 국가가 독일에 대한 경제력의 열세를 보완해주는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유럽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의 추세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인 것으로 보인다. 동유럽과 옛 소련 지역의 국가들이 오로지 서유럽만 쳐다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럽의 경제적 위치는 더욱 부각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만약 유럽경제가 지금과 같은 경기침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거대한 통합유럽은 점차 역외 국가들에게 배타적인 성격을 띨 것이다.

우려할 상황에 처한 한국

 필자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논점은 주요 경제권 내지는 국가 사이의 경제적인 상호의존성을 새로운 경제질서의 안정보장책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주요한 경제권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는 많은 사람이 흔히 믿는 것보다 훨씬 그 연결고리가 약하다. 그리고 지금의 세계경제를 둘러싼 상황은 불길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정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당시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적 수준은 지금과 유사했으며, 그때도 전문가들은 경제통합이 심화되어 있어서 보호무역적인 지역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세계전쟁의 가능성은 없다고 큰소리쳤다.

 새롭게 형성되는 세계경제질서에 도사린, 점증하는 경제적 갈등과 충돌 가능성은 세계경제가 지난50년대나 60년대와 같은 성장의 황금기로 돌아갈 수 있을 때만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세계 경제성장의 황금기에 종식을 가져온 수많은 문제점을 선진국들이 극복하고 있다는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자유무역의 활성화를 통해 누구보다도 혜택을 많이 받아온 한국과 같은 국가는 지금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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