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석학의 ‘신국제경제질서’ 진단
  • 편집국 ()
  • 승인 2006.04.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유무역 大長征 계속된다



 세계는 이제 변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를 장악해왔으나 냉전의 종식과 함께 그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 오늘날 미국이 당면한 경제적 운명은 미국 스스로가 일찍이 선택한 결과이다.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을 자유진영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 자유무역을 선도하면서 우방국가들의 경제성장을 도왔다. 미국이 범세계적인 자유무역을 지향한 통상정책을 폈던 것은 미국 자체의 경제적 필요나 이익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소련과의 냉전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적·군사적·전략적 필요에서 미국은 다자간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통상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상정책을 추구할 만한 강한 경제력을 미국은 갖고 있었다. 미국이 우방국가 정부들의 강한 시장개입과 높은 무역장벽을 묵인하면서, 애써 다자간 자유무역을 선도할 수 있었던 것도 기본적으로는 미국의 경제력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미국, 슈퍼301조·지역주의로 양동작전

 그러나 냉전은 이제 끝났다.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에서 미국은 아직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지만, 그 경제력은 과거와 같지 않다. 미국의 생활수준과 생산성은 아직도 세계 최고를 유지하고 있지만 유럽과 일본은 그 격차를 급속히 좁히고 있다. 자동차·전자산업과 같은 몇몇 분야에서 미국은 이미 더이상 세계 최고가 아니다. 많은 산업분야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렇게 미국의 산업환경이 변화하자 미국의 기업들은 정부에 내수시장에서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외국의 시장도 정부가 나서서 열어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점점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미국의 대외통상정책은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압력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다.

 대외통상정책에 있어 미국은 과거와 달리 다양한 접근 방법을 쓰고 있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아래에서 다자간 방식을 추구하겠다는 기본적인 정책방향에는 아직 변함이 없으나, 슈퍼 301조와 같은 일방적인 방법, 혹은 북미자유무역협정과 같은 지역주의를 동시에 병행하기 시작했다.

 지금 세계경제에 불고 있는 유럽통합과 같은 지역주의는 우연히도 미국 경제의 쇠퇴와 맞물려 나타나고 있다. 생산성 저하로 미국에서의 시간당 실질수익은 지난 70년대 중반보다도 못한 형편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생산성과 노동인구 증가의 실질적인 감소를 고려할 때, 미국 경제의 장기적 성장전망은 2%도 채 안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미국 연방정부는 경제성장의 둔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았고, 그 결과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는 4천억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의 대도시는 온갖 사회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간단히 말해 지금 미국은 ‘집안문제’가 가장 심각한 현안이다.

 이러한 국내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포기하고 고립주의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당연히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립주의로의 선회가 미국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미국경제는 이미 세계화되어 있다. 국제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이미 국제화된 미국경제는 외국의 시장과 기술, 그리고 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놀랄 만큼 높다. 거대한 채무국으로 전락해 버린 미국은 이제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수출을 해야만 한다. 따라서 미국이 국내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과 기술, 그리고 개발에 투자해 스스로의 국제경쟁력을 회복하는 길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다.

범세계적 동반자관계 구축 시급

 미국이 더이상 세계경제를 주도하지 못하는 만큼 세계경제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3개의 거대한 경제블록으로 분할되리라고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블록 내의 국가 사이에는 자유 무역이 가속화되는 반면에 블록 사이에는 관리무역(managed trade)이 성행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가 블록화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지구상의 어떠한 국가나 경제권도 범세계적인 자유 무역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강하거나 독자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리무역을 바람직한 무역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국가나 지역경제권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경제를 분할하기보다는 국가간 경제통합을 심화시킬 수 있는 범세계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루고 발전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바람직한 신국제경제질서를 구축하는 열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미국은 동반자적 관계에서 지도적 역할을 계속 수행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과거와 같이 다른 국가에게 명령하는 위치에 설 수는 없다. 지배하는 자가 아닌 '동렬에서의 선두'라는 변화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미국은 신속히 적응해야 한다. 미국의 역할과 책임이 변화한 것처럼 일본과 유럽도 세계경제체제를 위해 이제는 과거보다 더욱 큰 역할을 가져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미국과 비교해볼 때 일본은 오히려 미국과는 전혀 상반된 입장에 놓여 있다.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은 냉전구도 아래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능했고, 또 그러한 체제에 일본은 크게 의존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자신이 세계경제에 어떤 영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경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버렸다. 일본의 모든 움직임은 곧장 세계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세계의 지도자적 국가의 반열에 서서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동반자가 되려면 일본도 이제는 자국의 경제를 개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유럽의 국가들도 유럽의 시장을 전세계에 열어놓은 채, 폐쇄적이지 않은 통합유럽을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가트체제는 국가간 무역장벽인 관세와 쿼터를 단계적으로 철폐해나가는 데 그 기본 목표가 있다. 가트는 관세장벽을 넘어선 각국의 차별적인 무역정책과 정부의 시장개입을 조절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대외무역에서 심한 차별정책을 펴는 개발도상국가들을 제재한 적이 거의 없다. 오늘날 각국의 경제는 급속히 국제화되고 있다. 바람직한 세계경제체제를 달성하려면 단순히 관세장벽을 제거하는 지금까지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제는 세계경제통합을 좀더 심화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할 것이다.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하루아침에 경제통합을 달성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래서 지금 쌍무적인, 혹은 지역적인 시장통합이나 자유무역협정이 싹트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지역적 무역협정이 좀더 열린 세계경제체제로 나가는 하나의 촉매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유럽국가들이 지금 통합을 서두르는 것은 유럽을 보호무역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유럽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면 역외 국가들에게도 장점이 있다. 한 예로 통합유럽이 채택할 단일화된 시장규범과 규격은 이 지역에 수출하고자 하는 기업들에게 하나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참가한 것은 자국의 시장을 열기 위해서이지 결코 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멕시코는 지난 6년 동안 외국상품과 외국인 투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방해왔다. 유럽의 통합과 유사한 어떤 지역협정을 일본·한국과 같은 아시아 국가가 추진하면, 결국 그것은 아시아 지역 내에서 자유시장의 원리가 좀더 효율적으로 작용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에 접근하려는 아시아 지역 밖의 외국 기업들에게도 결국은 이익이 되는 것이다.

 통합유럽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은 결코 역외의 국가들을 차별하고자 하는 보호무역적인 지역협정이 아니다. 유럽공동시장은 처음 6개 국가로 시작해서 12개 국가로 확대됐으며, 곧 스칸디나비아국가들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동유럽으로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 역시 서반구의 국가들은 물론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까지 점차적으로 확대돼나갈 것으로 보인다.

지역협정은 가트체제 대신할 수 없어

 그러나 지역협정들이 보호무역적인 블록으로 돌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가트의 다자간 원칙과 제재조처가 필요하다. 지역적인 무역협정은 범세계적인 가트의 다자주의를 보완하는 하나의 조처는 될 수 있지만, 결코 하나의 통일된 국제규약인 가트체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현재 협상중인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면 가트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된 세계적 규범은 무역의 범주를 넘어 각국의 산업정책과 지적소유권, 그리고 각국 정부의 대기업정책과 같은 훨씬 광범위한 분야로 확대돼나갈 것이 틀림없다. 물론 그 길이 순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나라가 일방통행식의 이기적인 무역정책과 관리무역과 같은 보호주의에 계속 호소할 것이다. 그러나 긴 안목을 갖고 내다보면 자유화로 나아가는 세계경제의 대장정은 결코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신념이다.

 한국과 같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세계경제의 통합을 예고하는 신국제경제질서는 분명히 힘겨운 도전이다. 자국의 시장은 닫아놓고도 세계시장에 마음껏 수출할 수 있던 개발도상국의 특혜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자국의 시장을 열지 않으면 자신도 다른 나라의 시장에 접근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