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월드컵으로 간다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4.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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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미디어 축제, 18일부터 한달간 ‘열전 드라마’

앞으로 1주일. 6월18일부터 7월18일까지 한달 간 세계의 표준시는 바뀐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미국내 아홉 개 축구 경기장으로 ‘임시 이전’된다. 연인원 3백10억 명(추정치)의 시청자가 시계를 월드컵 중계 시간에 맞춘다. 월드컵이 열리는 한달 동안 세계에 ‘시차’는 없다. 한달 동안 지구촌을 지배하는 황제는 월드컵이다.

 월드컵은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지구촌 잔치다. 국가와 민족 이기주의는 완강해서 좀처럼 빗장을 풀지 않고 있지만, 월드컵은 국적과 지역,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국제 정치와 경제는 잠시 괄호 속에 들어가고, 축구팀으로 대표되는 국가 간의 ‘선전 포고’로 팽팽하게 긴장한다. 이때 각국의 국민은 11명이고 통치권자는 감독이다. 팀이 패하면 그 국가는 잠시 패망하고, 이들이 승리하면 그 국가는 한동안 열광한다. 월드컵 세계대전. 6월28일까지 스페인 · 볼리비아 · 독일은 우리의 ‘철천지원수 국가’로 돌변한다.

“월드컵 기간에는 테러리스트도 쉰다”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요일에 테러가 가능할까?”라고 물은 이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였다. “월드컵 기간에는 테러리스트들도 잠잠하다. 아무도 자기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에코는 자답했다.
 야구와 미식축구에 입맛이 길든 미국인들은 내심 ‘사커’를 뜨악한 표정으로 외면하고 있지만, 월드컵 드라마가 중계되는 동안 미국 사회도 바뀔 것이다. 다양한 인종들은 한달간 미국 국적을 벗어버리고 모국에서 온 축구팀을 따라다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계는 이탈리아 축구팀의 경기가 벌어지는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버스를 전세내 들이닥칠 것이다. 대통령보다 축구선수가 더 유명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출신들 또한 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 교포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꽹과리와 징이 대형 태극기와 어우러질 터이다. 본국에서 원정온 응원단과 미국내 이주민들이 손을 맞잡고 펼치는 응원전은 ‘스탠드의 월드컵’이다. 월드컵은 국가와 인종을 새롭게, 일시적으로 차별화시킨다.
 국내에서도 월드컵 바람은 벌써부터 강풍으로 바뀌어 있다. 사상 최고의 당첨금 5억원을 내건 ‘월드컵 참가기념 체육복권’이 발매되고 있으며, 한 음료 회사에서는 월드컵 퀴즈를 내놓았다. 연예인들은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한국대표팀의 16강 진입을 기원하는 친선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가자! 월드컵으로’. 모든 매체들은 월드컵 특별취재팀을 풀 가동하기 시작했다.

 월드컵 현상은 ‘월드컵 주의보’를 동반하기도 한다. 출판사들은, 관심이 온통 월드컵에 쏠릴 것을 알기 때문에 월드컵 기간에 아마 신간을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술집들도 일찍 문을 닫고 택시 승객도 줄어들 것이며, 극장 · 공연장이나 프로야구 스탠드도 빈 자리가 늘어날 것이다. 벌써부터 전국은 월드컵에 대한 담론으로 가득차 있다. 저마다 감독이고 코치이며 해설가이다. 축구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을 뒤덮어 버린다.

전파와 돈이 펼치는 열광의 잔치
 83년 한국 청소년 축구가 세계 4강에 들었을 때,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적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그 때 결승전에 진출하면 그날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16강 진출이 이루어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월드컵 축구가 촉발하는 ‘광기의 장면’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유럽과 남미의 경우이지만 열성 팬들은 경기장을 ‘성소’ 또는 ‘해방구’로 여기는 모양이다. 축구 앞에서 일상의 모든 규제와 금기는 사라진다. 일상의 시간은 정지된다. 카타르시스와 동일시, 그리고 보상심리의 극대화가 거기에 있다. 스포츠와 종교는 닮아 있다는 견해도 벌써부터 나와 있다. 대형 불꽃을 잘못 터뜨려 실명하는가 하면, 울분을 참지 못해 권총 자살을 하기도 하고, 관중들의 싸움이 국가간 전쟁으로 번진 예도 있다.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도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유념해야 할 한 가지. 월드컵은 우리가 텔레비전으로 ‘보고 즐기는 스포츠’이지 우리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실제로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축구 경기에 관여할 수 없다. 다만 가만히 앉아서 즐길 뿐이다. 월드컵은 어쩌면, 미국내 아홉 구장에서 개최되는 실제 축구 경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파 미디어와 스폰서들의 돈주머니, 혹은 열성 팬의 기대감 속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월드컵이 ‘꿈의 구연’이라는 찬사를 이 맥락에서 다시 번역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월드컵조직위원회의 시간표에 따라 주심의 호루라기는 정확한 시간에 울려 퍼지고,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동원되는 중계방송은 ‘아름다울’ 것이고, 축구팬들은 열광하면서 화면 속으로 몰입할 것이고, 그래서 월드컵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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