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의 그늘' 드리우는 독일
  • 프랑크푸르트 · 허 광 (자유 기고가) ()
  • 승인 1994.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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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후 세계 3위 군수품 수출국 도약…시장 개척 적극 나설 듯

지난 1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내전과 전쟁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은 어린이는 1백50만명, 불구자는 4백만명, 난민은 5백만명에 이른다. 전체 사망자 5명 중 4명이 민간인이다. 올해 유엔아동구호기금(UNICEF)의 보고서가 보여주는 지구촌의 얼굴은 이렇게 음산하기만 하다. 이렇다 할 군수 산업이 없는 제3세계 나라들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들 대다수가 미국 · 러시아 · 중국 · 서유럽 · 일본에서 흘러 들어간 무기에 짓눌려 신음하는 셈이다. 전체 무기 수출고에서 70∼80%의 실적을 자랑하는 다섯 나라가 바로 유엔안보리의 5개 상임 이사국이다.

 92년 여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선진공업국 정상회의(G7)는 처음으로 유엔의 '군비등록제'가 중요하다고 인정해 한때 무기수출 통제에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기 이전의 투명성을 높이고 이를 억제하는 수단으로 91년 유엔총회가 결의한 이 제도는, 각 나라가 무기 수출 정보를 보고해야 한다는 구속력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무기 수출 건수와 수입국을 유엔에 보고하도록 권고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무기 수출액과 생산 기술, 민수용으로도 사용하는 범용 군사기술 이전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게 되어 있다. 아무리 보아도 무기 수출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5월18일 공개된 미국 회계감사원의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88∼92년 1천5백건의 범용기술을, 그것도 핵확산방지조약에 여전히 거부 반응을 보이는 아르헨티나 · 브라질 · 인도 ·이라크 · 이스라엘 · 파키스탄 ·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수출했다고 전한다. 미 국방부가 핵무기 개발에 전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기술의 이전을 미국 정부가 승인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핵공급국가그룹(런던그룹)이라는 국제 조직과 '미사일관련기술수출규제(MTCR)' 조처를 통해 제3세계에 대한 첨단 군사 기술 누출을 막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해도 국제 여론의 불신을 씻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통일 이후 세계 3위의 무기 수출국으로 나섰다. 어느 나라보다 까다로운 무기수출통제법을 가진 나라가 무기 수출 대국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독일의 무기수출통제법은 △나토 동맹국의 집단 방위를 위해 △긴장과 분쟁이 없거나 인권보호에 문제가 없는 곳에만 무기 수출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첫째 조항을 적용할 때 나토에 속하는 터키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터키가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을 탄압하는 데 투입하고 있는 무기 중 하나가 독일에서 넘겨준 동독군의 전차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독일 기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쿠르드 현지에서 촬영해온 사진을 보고 옛 동독 군인들이 자기들이 쓰던 무기라고 증언했지만 독일 정부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있다. 확실한 증거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지난 4월에는 독일의 쿠르드족 정치 난민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분신자살까지 하면서 독일 정부를 규탄했다.

 둘째 조항에 문제가 되는 대표적인 예는 인도네시아이다. 콜 독일 총리는 92년초 인도네시아 방문 길에 1억마르크의 개발원조를 하고 옛 동독군 해군 장비의 절반인 군함 39척을 매각키로 결정했다. 이 계약은 단순한 재고 처분 같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인도네시아의 조선업과 해군 육성이라는 전체 사업과 연결되어 있다. 군함의 매각 액수는 고철값에 못미쳐도 수리 · 재설비 · 수송비를 포함해서 인도네시아 현지 수리에 필요한 조선소, 항구 확장 그리고 연료 보급선 확보에 드는 비용이 포함되어 1척당 2천8백만 마르크의 군함이 마지막에는 39척 모두를 합쳐 18억마르크로 둔갑했다. 그래서 세계은행은 이 사업이 '길을 잘못 든' 개발원조라고 비난한다.


법 어기며 '인권 억압국'에 무기 팔아
 독일이 인도네시아와 서남아시아 일대에 새 시장을 확보하자면, 또 인도네시아를 등에 업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는데 비동맹권의 지지를 얻고자 한다면 세계은행의 비난 정도는 대수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다시 무기수출통제법이 문제가 된다. 인도네시아는 나토 국가도 아니고 동(東) 티모르 점령 이후 이곳 원주민과 적대관계에 있는 대표적인 인권 억압국이다.

 서남아시아의 지역 패권을 노리는 인도네시아 정부로서는 해군 증강이 필수이다. 지역 패권 장악에 앞서 해묵은 동티모르 문제를 정리하는 것도 시급하다.

 인도네시아는 식민국 포르투칼이 티모르를 떠난 이후 75년부터 이곳을 점령해 통치하고 있다. 국제 앰네스티는 75년 이후 지금껏 이 지역 주민 20만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한다. 언론 · 집회 · 결사의 자유는 볼 수 없는 곳이다. 독일은 91년 11월12일 또 한 차례 학살극이 있은 뒤에도 군함 수출을 결정했다. 유엔 총회는 인도네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여러 차례 냈지만 유엔안보리는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않고 있다. 미국상권 외교위원회는 독일과 인도네시아가 어떤 형태의 군사 협력도 즉각 중지하라고 결의했지만 미국 상원은 여전히 이에 대한 의결을 미루고 있다.

 스웨덴 국회는 93년말 인도네시아에 대한 무기 수출을 중단했다. 국제법상 티모르의 주권은 포르투갈이 갖고 있다. 포르투갈 정부는 독일의 무기 수출에 공식 항의했다. 독일 정부가 유엔의 인도네시아 결의안에 동의한 것은 지난해 3월. 그러나 같은 해 가을부터 인도네시아 해군을 훈련시키고 있다. 독일의 군함 수출 계획에서 인도네시아 쪽의 대표는 하비비에 과학기술장관이다.

 그는 독일 유학후 뮌헨의 군수 기업 '메서슈미트 뵐코브 블롬(MBB)'에서 경력을 쌓았다. 귀국 뒤 항공 · 조선 · 군수산업 건설계획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의 자문역을 맡기도 했고, 현재는 10개 국영기업 총수로 있다. 그 결과 MBB는 인도네시아의 생산설비 도입에서 주계약 기업이 됐다. 하비비에와 독일 정부의 기술연구부 그리고 독일 군수업체의 유착관계는 언제나 외부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독일의 시민운동 조직은 독일 정부의 무기수출 계획이 알려진 92년 초부터 군함 수출에 반대하는 공청회 조직, 군함 점거 농성, 유엔 인권회의 홍보 활동, 노이슈타트에서 일으킨 시위 등으로 여론을 불러일으켜 왔다. 93년 7월에는 국회 청원위원회에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직 반응이 없다. 브레멘 · 노이슈타트의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군함 수출과 관련된 이 지역의 조선 · 군수 업체의 중역이어서 몸을 사린다.

무기 수출 규제조처 '행방불명'
 지난해 12월 기민당이 제안해 의회에서 심의를 받고 있는 무기수출법 개정안(일명 라머안)을 보면 독일 정부의 생각은 분명하다. 이 개정안은 독일의 무기 수출 정책이 유럽과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독일 군수산업이 낙오할 수밖에 없다고 하며 유럽 공동으로 군수 시장을 설립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독일은 나토 밖의 지역에 무기를 수출할 때 제3국과의 공동생산이라는 형식을 이용해 왔다.

 수출되는 무기는 마지막 조립 작업을 하는 국가의 국적을 갖게 되므로 독일은 이 무기의 수입국과는 무관하다는 논리였다. 기민당의 개정안은 그동안의 관례를 법적으로 확인하고 유럽의 공동생산이라는 형식으로 세계 무기시장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독일 정부는 불법적인 군사장비 유출 혐의가 있는 기업에 대해서 96년까지 통신 검열과 도청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5월18일 이 문제를 다룬 연방의회 청문회에서 연방정보부장은 국내 정보 활동에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조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간 기업의 무기 수출과, 이들과 연결되어 있는 국제 무기밀매 조직을 근절하는 데 해외정보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일의 무기 수출 가운데 95%가 연방안보회의 비밀회의에서 승인을 받고 있고 지금까지의 수출규제 조처도 사문화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민간 기업의 정보 검열, 일반 시민권의 제한을 통해 무기수출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어떤 시점에서 구체화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발상은 통일 독일이 다시 '보통 국가'로 변신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징표인 것만은 틀림없다.
프랑크푸르트 · 허 광 (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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