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무죄 판결의 교훈
  • 한승헌 (객석편집위원 · 변호사) ()
  • 승인 1994.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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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물망에 오른 사람이 적격자인지를 공개 검증하는 인사청문회 제도를 도입해 독단적 인사를 막아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건의 판결문을 읽으면서 두 가지 점에 놀랐다. 그 하나는 지금부터 백년전의 왕권 전제에 대한 ‘민란사건’이었는데도 제법 격식을 갖춘 판결문에 따라 처벌했다는 점이요, 둘째는 그 와중에서도 억울한 피고인을 가려내어 무죄 판결이 상당수 나왔다는 사실이다. 무죄 판결문에는 ‘아무개는 황해도 어디에서 동학당에 가입하여 지방 안녕을 해한다 하기에 붙잡아다가 이 재판송서 심문을 해본즉 피고 등이 동학당에 가입하여 지방 안녕을 해하였다는 증빙이 적확(的確)치 못한지라, 위와 같은 이유로 피고 아무개를 무죄 방송사(放送事)’라고 적혀 있다.

 언필칭 민주 국가라는 오늘날에도 내란이네 국가보안법 위반이네 하는 시국 사범은 무죄 판결로 석방되는 일이 거의 없고 보면, 백년 전의 무죄 판결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사법권의 독립 같은 것은 언두도 못내던 ‘법무아문(法務衙門) 권설(權設) 재판소’에서 한 재판도 그 정도는 되었으니 대한민국의 법관들은 가슴에 손을 얹어볼 일이다. 더욱 놀랍게도 경성 주재 일본제국 영사 아무개가 회심(會審)을 했다는 서명까지 판결문에 들어 있다. 재판에 간섭한 일본의 영사조차도 무죄 판결을 인정했다는 표시다.

지금까지 시국 사건은 ‘좌우간 유죄’
 이 땅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간판과 사법권 독립이라는 문패가 겉으로는 그럴듯했지만, 그런 간판 그런 문패를 걸고 있는 집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은 그리 자랑스럽지 못했다. 한번 구속 기소가 되면 여간해서 무죄 판결이 나지 않으며, 특히 시국 사건 · 반정부사건에서는 증거나 법리야 어찌 되었건 ‘죄우간 유죄’가 원칙이자 관례가 되었다.

 국가와 법률의 이름으로 그릇된 판결이 누적되어 갈 때에 법관의 자질과 신념 부족을 탓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법률과 양심’에 의한 재판을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자 책무이다. 사법부의 독립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흔들렸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그 방지책을 제언하는 것도 당연하다.

 다음 달에 임기가 끝나는 대법관 6명에 대한 후임 인사를 앞두고 국민들은 새 대법관 임명에 관해서 전에 없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법부 가운데서도 대법원의 인적 구성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국민 기본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비할 데 없이 중요하다. 사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대법관 적임자 기준에는 먼저 ‘이런 사람은 안된다’는 배제 요건의 유무가 검증되어야 하는데, 지난날 국민 기본권의 압제에 한 몫을 한 판 · 검사는 우선 제외해야 한다. 일반 사건 오판도 문제지만 맥 없이 눌리거나 추종한 나머지 그릇된 판결을 한 사람은 대법관의 자리에 앉혀서는 안된다.

법관의 첫째 덕목은 외부 압력 물리치는 신념     
 대법관이 될 인재의 요건은 권력을 위한 재판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재판을 할 수 있는 신념과 자질을 소유했느냐 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당한 외부 압력을 단호히 배제할 만한 신념은 법관의 첫째가는 덕목이다. 그러나 사법의 과오는 외부로부터의 입김과 무관하게 조성 될 수도 있다. 법관 자신의 편견이나 비민주적 사고는 외부 간섭 없는 재판에서도 위험한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적임자를 가려내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있다. 임명제청권자인 대법원장이 미리 집권자측이 ‘의중’을 헤아려서 제청하는 전례는 단호히 배척해야 하며, 동시에 대법원장의 독단적인 밀실 인사도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대법관 물망에 오른 사람이 적격자인지 여부를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인사청문회 제도는 국민의 여론을 가늠하는 적절한 방식의 하나로 장려할 만하다.

 대법관 임명동의권을 갖는 국회가 국회법상의 청문회를 여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특정 인물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공개적인 평가를 하는 데는 위험과 부작용이 따를 수가 있지만, 일정한 준칙을 정해 구체적인 근거에 따라 객관성 있는 평가를 해나간다면 그리 걱정할 것이 없다.

 대법원 당국자와 여권 일부에서는 그런 청문회가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이나 사법권의 독립을 해치는 것처럼 못마땅해하는 모양인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만일 그런 공론화조차 사법권 침해라면, 입법 사항이나 행정 문제에 대한 국민 각계의 공개토론은 입법권 또는 행정권 침해가 된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작 사법권을 침해한 진범에는 눈을 감고 주권자인 국민의 사법 감시에서만 벗어나고 싶어하는 심사는 거두는 편이 좋다.

 다음달에 있을 대법관 인사에서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적임자가 등용됨으로써 이 나라의 사법부가 지난달의 오명과 불신을 씻어내고 참다운 국민의 사법부로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한편, 대법원의 보수적 단색화를 막기 위한 재야 법조인 등용 또한 잊어서는 안될 요체임을 아울러 강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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