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최고의 경전“ 天符經
  • 이문재 기자 ()
  • 승인 2006.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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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원리 담고 있다” 연구 활발 … 학계, 인정 안해



 天符經 연구자들은 개천절을 전후해 착잡해진다. 단기 4325년인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조 단군이나 개천에 대한 '국민' 일반의 인식에 생각이 미치면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다. 단군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의 괄호 속에 묶여져 있고 '반만년 역사'는 자조적인 문장 속에 삽입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겨레와 나라의 발원지에 대한 이같은 무관심 속에서도 "유불선 3교의 근원인 민족 최고의 경전 천부경"을 연구하는 재야 학자들의 자부심은 크다. 이들의 연구열은 때로 너무 자신만만해 보여서 신비주의로 몰리기까지 한다. "문장으로 해석할 수 없는 기호나 부적"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하는 천부경이란 무엇이고,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80년대 후반 《한단고기》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등 알려지지 않은 상고사관련 저술들이 발간되면서 천부경은 차츰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천부경 관련 연구는 단행본 등 50여종에 이르며, 출간을 앞둔 책들도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천부경의 대중화에 이바지했지만, 이를 신비화시켜 기존 학계와 거리를 크게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현재 정통 학계에서는 천부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천부경은 고구려 · 백제가 멸망한 이후 현재까지 줄곧 숨겨지고 외면당했다"고 《천부경》 저자 崔東煥씨 (39)는 말한다.

 천부경이 다시 햇빛을 본 것은 그것이 한자로 기록된 이후 천년이 지난 금세기 초였다. 홍범도 ·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던 桂延壽가 1916년 묘향산에서 최치원이 석벽에 새겨놓았다는 천부경 81자를 발견한 것이다. 계연수가 1900년대 초에 엮은 《桓檀古記》에도 원문이 실려 있다. 이 석벽본과 더불어 1920년대에 편찬된 崔致遠 전집 《고운집》 사적편에 들어 있는 본(사적본) 이 천부경의 대표적 판본으로 꼽히는데, 두 본은 서로 일곱자가 다르다. 한편 《삼국사기》의 "최치원은 …중략… 나라에 유불선 3교를 포함하는 玄妙之道가 있으니"라는 대목에서 '현묘지도'를 천부경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천부경 연구자들은 거개가《周易》 연구자들이다. 계연수의 천부경 발견 이후 이유립 · 전병훈 등 11명의 재야 사학 한학자들의 한문 주석을 한데 모은《천부경集註》를 준비중인 李讚九씨(37 · 주역 연구가))는 천부경과 주역의 함수관계가 매우 크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예컨대 易의 기본 8괘는 3획(효)인데 그것은 천부경의 天地人(三極사상)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천부경 연구자들은 너나없이 "주역은 천부경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씨는 《노자도덕경》이나 불교 《法性□》 그리고 《삼국유사》의 단군사화 편에서도 천부경의 사상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천부경은 1부터 10까지 숫자에 대한 언급이 많아 數사상이 큰 줄기를 이루고 천지인 3극사상 · 인간중심 사상 · 한(一) 사상 등을 특징으로 한다고 이찬구씨는 밝히면서 "천부경의 자구 해석은 현단계에서 큰 의미가 없다. 자칫 나무만 보고 숲 (동양사상 전체와의 맥락)을 못보게 된다"고 강조한다.

 최동환씨는 천부경의 중심사상을 △누구에게나 그 내부에 하나님이 내려와 있으니(一神降□) △그 자신의 중심을 찾아 깨닫고(性通光明) △그 善함으로 땅 위의 삼라만상을 활용해 인간을 유익하게 하며 (在世理化) △이로써 남과 더불어 사는 것(弘益人間) 이라고 요약하면서 "천부경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니다. 매우 현실적인 사상이다"라고 강조한다. 모든 사회체제의 한계를 넘어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미래사회를 천부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씨는 "천부경이 제시하는 사회는 종교 이전의 종교, 종교 이후의 종교이다. 세계적인 사상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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