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대원군 ‘쇄국’닮은꼴
  • 전상인 (편집자문위원 · 사회학) ()
  • 승인 199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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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 한국사’북녘 땅에서 되풀이

 한오백년 전 ‘國之語音이 異乎中國’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한글을 창제하기로 작심한 세종대왕이 허탈하게도, 언필칭 세계화 시대라 하는 요즘 세상에는 ‘우민’들의 한자 무식이 오히려 화근으로 치부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작년 초 문민 정부 출범을 전후하여 ‘제2의 건국’이 운위되더니 작년 말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에는 ‘제2의 개국’이 세간에 자자하다. 그러나 이쪽의 형편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갈라선 우리의 반쪽 북한은 세계화의 마지막 오지로 굳세게 남아 있다. 세계사적 조류를 따라 북한이 개혁과 개방이라는 문패를 붙이고 빗장을 여는 것은 시기 상조인가, 시간 문제인가.

 한 오백년을 장수하던 ‘은둔의 왕국’ 조선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고립과 개방 사이를 번뇌했다. 개방의 압력은 서세동점을 통해 자본주의의 세계적 ‘완성’을 꾀하던 제국주의 행각으로 나타났고 당시의 조선도 지금의 북한만큼 세계화에 관한 한 처녀지였다. 자본주의가 중국의 만리장성조차 무너뜨릴 무렵에도 조선의 집권 세력은 척사와 제노포비아(xenophobia)를 고집했다. 그 주역은 흥선대원군.‘철부지’고종을 섭정했던 10년(1864~73) 동안 그는 쇄국에 국운을 걸고 왕권을 확대하는 데 진력했다. 서학을 경계하는 대신 유교적 통지 이념을 강화했다. ‘영원한 제국’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경복궁 중수에 필요한 백성들의 고혈은 자발적으로 바쳐져야 할 것이었다. 대원군은 선친의 무덤까지 손을 댄 洋夷들에 대해 새로 만든 대포로 철저히 ‘손을 본’ 지도자였다. 그러나 권불십년, 그가 물러나고 고종 집권 3년 만에 제물포에서부터 쇄국의 자물쇠는 뜯겨져 나갔다.

입으로는 세계화, 마음은 구한말
 세계화의 첫 경험은 이 땅에서 강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경험은 바깥 세상에 대한 심리적 트로마(trauma)와 콤플렉스를 우리네 정서 속에 깊이 심었다. 광복이 되고 남북으로 나뉘어진 한반도는 서로간에는 물론 밖으로도 담장을 높이 쌓았다. 그리고 주변 열강 국가 사람을 부를 때 ‘놈’자를 즐겨 붙였다. 한국의 경우, 50년대는 수입대체 산업화가 고작이었고, 60~70년대 수출 드라이브 역시 사실은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이었다. 일부 계층에나마 외국 상품이 ‘합법적’인 소비 대상이 되고 여행과 유학이 자유화된 것은 겨우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까지도 진정한 세계화는 우리에게 강요된 선택에 가깝다. 입으로는 세계화 · 미래화를 외쳐대지만, 마음은 아직도 구한말인 것이다.

 북한은 더욱 더 폐쇄적이었다. 그것은 예의 전통의 유산이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압박과 봉쇄가 야기했던 불가피한 운명이기도 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시된 자력갱생 원리는 50~60년대 전후 복구 및 경제 발전에 있어서 북한을 자주와 주체 노선을 택한 제3세계의 모범 사례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국제적 고립화는 사회주의 발전의 한계 효용을 체감시켰다. 70년대 이후에 지속된 성장의 둔화가 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해체에 의한 세계 체제의 대변혁을 만났을 때, 북한은 한국 전쟁 이후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몰렸다. 19세기 말에 조선이 경험한 내우외환이 20세기 말 북한에서 재현된 셈이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소련의 항복을 얻어낸 여세를 몰아 북한의 문을 다시 두드리며 김일성의 백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김일성은 한말의 대원군을 닮아 있다. 20세기식 주체와 쇄국의 주역으로서, 외부로부터의 강요된 개방을 거부하며 그는 또 하나의 영원한 제국을 꿈꾸고 있다. 대원군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일까, 강화된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안달인 가운데, 과시적인 평양 거리와 호화로운 생일 잔치는 ‘왕조’의 건재와 위엄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이름은 배타주의적 호언 또는 현대판 위정척사와 호국안민 논리를 연상케 한다. 김일성이 조선의 군주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수령의 무오류성과 전지전능을 전제로 한 신격화 정도일 것이다. 아울러 그의 핵무기 전략은 현재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洋擾’ 해결책으로서, 공멸의 가능성을 담보로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시대적 도박으로 인식되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의 쇄국정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면 윤회처럼 찾아온 20세기 말 북한의 선택 딜레마는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반복을 좋아하는 것이 역사의 버릇 가운데 하나인데도, 대원군에 대한 북한의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의 쇄국 정책은 민족적 위기를 일시적으로 막았다는 점에서만 ‘일정한 긍정적 의의’를 가질 뿐, ‘대외활동을 능동적으로 풀어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는 ‘반인민적’이었다고 단죄된다(《조선전사》 제13권 참조). 그렇다면 김일성 자신은 대원군과의 차별화를 과연 이룰 수 있을까. 권좌 50년을 목전에 두고서 천수를 다해 가고 있는 김일성의 ‘마지막 승부’는 이제 초읽기에 들어갔다.

 대원군식 오기가 이번에는 19세기 말과 달리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승리할까, 아니면 과거의 대만처럼 그리고 오늘날의 다른 ‘생존’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와 같이 김일성도 20세기판 ‘東道西器’를 주도할까. 그의 대가 아니라면, 김정일은 또 다른 옛날의 고종이 될까, 아니면 새로운 고종의 모습을 내보일까.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요즘 백년 전의 한국사를 다시 읽는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세찬 세계화에 덜미잡힌 우리 스스로도 이제는 북한의 개방과 세계화를 채촉하는 데 한 몫 거들고 있다는 점이다.
全相仁 (편집자문위원 ·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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