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사관학교 ‘X대학’
  • 파리·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0.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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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2백주년 맞은 프랑스 에콜 폴리테크닉…콩트·데스탱·아탈리 등 거물 배출



 프랑스가 자랑하는 명문 대학 중의 하나인 에콜 폴리테크닉(파리 이공과 대학)이 올해로 개교 2백주년을 맞아 전시회 · 학회 · 무도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열고 있다.

 수에즈 운하, 프랑스 전국을 누비는 철도망, 《레미제라블》의 무대이자 관광 명소의 하나인 파리의 하수도 및 지하철, 프랑스의 긍지인 고속전철(TGV), 핵발전소, 핵잠수함, 에어버스 비행기 등 19 · 20세기를 장식하는 굵직굵직한 토목공사와 발명품을 상당부분이 이 학교 출신들의 작품이다. 또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앙리 푸앵카레, 실증주의의 효시인 오귀스트 콩트를 비롯하여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 자크 아탈리 전 유럽개발은행 총재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학교 졸업생들이다.

70년대 중반 최초로 여학생 입학
 에콜 폴리테크닉은 프랑스인들 사이에 간단히 X라고 불린다. 이는 대포 두 대를 교차해 놓은 학교의 상징에서 비롯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X에 미지의 과학 세계에 대한 도전이라는 개교 이념을 덧붙이기도 한다. 어쩌면 최고 명문이라는 명성에 비해 속사정은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까지 이 X라는 글자 속에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

 폴리테크닉은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국립 사범대학교)와 더불어 철저한 엘리트 사회인 프랑스 사회의 양대 지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국무 · 법무장관을 지낸 알랭 페르피트의 지적대로 이 엘리트 사회가 프랑스의 폭넓은 발전을 저해하는 고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프랑스를 이끌어가는 견인차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국가 차원에서 다른 고등교육 기관은 제쳐놓고라도 몇몇 명문 학교에만 집중 투자하고자 하는 편애의 유혹이 크다. 사립 대학 없이 모든 대학이 국립 대학으로서 이론상 완전한 평등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프랑스 대학 풍토에서 그랑드 에콜이라 불리는 이 같은 명문 대학의 존재는 미묘한 이중 구조를 이룬다. 이것이 대학 사회 구성원간에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출세의 지름길인 명문 학교들의 입시 경쟁률은 자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에콜 폴리테크닉은 이공대이니만큼 수학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의 머리 씨름장이다. 작년의 경우 4백명 모집에 2천6백명 가량 지원자가 몰려 6대1이 넘는 경쟁률을 보였다. 한국인 중에도 폴리테크닉을 졸업한 사람이 있다고 홍보과에서 전해준다.

 에콜 폴리테크닉이 다른 그랑드 에콜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 학교 재학생들의 신분이 군인(예비역 사관)이라는 점이다. 재학생에게 군인 신분이 부여된 것은 개교 10년만인 나폴레옹 치하에서부터였다. ‘조국 · 과학기술 · 명예’라는 교훈을 제정한 것도 역시 나폴레옹이었다. 일반 사관학교와는 교육 과정상 판이하지만 현역 장군 중에서 교장이 임명되어, 명문 학교 중 유일하게 입학 시험에 체력 검사가 포함된다는 점에서는 같다. 사관생도들도 마찬가지로 해마다 7월14일 샹젤리제에서 열리는 연례혁명기념 시가행진(우리나라 국군의 날 행사에 해당)에도 참가한다.

 전교생 모두에게(외국인 제외) 학비가 면제되는 동시에 월급이 지급되는 특혜도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주어진다. 국가로부터 완전히 무상으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으므로 가난한 집안의 자제들도 재능만 있으면 얼마든지 엘리트 대열에 낄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실제 통계상으로도 입학생의 30% 정도는 저소득층 출신이다. 하지만 객관적 통계 숫자와 세간에 널리 퍼진 통념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한편 군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개교이래 줄곧 남자들의 아성으로 여겨져온 X에 최초로 여학생의 입학이 허용된 것은 70년대 중반의 일이다. 현재 여학생이 정원의 약10%를 차지하고 있다.

 파리 시내 학생가의 좁은 캠퍼스를 떠나 76년 파리시 남쪽 교외의 광대한 팔레조 캠퍼스로 이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침 기상나팔 소리, 귀교 시간을 넘긴 학생들이 몰래 담을 넘어 기숙사로 찾아들던 모습은 파리 시민들에게 그다지 생소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난히 짓궂기로 소문난 선배들의 신입생 군기잡기, 특별 사전이 있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X들만의 은어는 일반인의 호기심을 한층 더 자극한다.

X출신 모시려는 기업체 줄어
 학생들의 정치 성향은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는 군대의 영향 때문인지 개교 이래 줄곧 보수적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오귀스트 콩트의 후학답게 과학기술 분야의 항구적 발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정치 성향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의 낙관적 진보주의 성향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프랑스 학생의 경우 입학 첫 해는 군복무로 대치된다. 나머지 2년 동안에는 수학 · 물리학 · 화학 외에 인문사회과학 · 외국어 · 체육 등의 공동 과목을 골고루 이수하게 된다. 이과 과목에만 치중하던 종전의 학사 과정에 비하면 획기적인 변화이다. 합리적 · 실증적 사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지나치게 세부적인 전공을 강요하기보다는 과학 분야를 두루 섭렵하게 하는 교육 철학 또한 에콜 폴리테크닉의 특징이다. 극도로 미분화해가는 추세에 적응해 나아가야 하는 미래의 지도자에게는, 한 분야의 전문 지식보다는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는 능력이 더 절실히 요구되리라는 판단에서이다. 그러나 전문적이기보다 종합적이기를 지향하는 폴리테크닉의 이상은 이 학교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으로 지적된다. 3년 간의 학사 일정을 수료해도 당장은 기업이나 관공서가 실무에 써먹기 어려운 인재만을 양성한다는 비판을 자주 듣는다.

 그렇지만 실상 3년(외국인은 2년)만에 학교를 떠나는 학생이 절대 다수는 아니다. 군복무 및 공동 과목을 이수하고 난 폴리테크니시앙들은 국가 기관이나 사기업체 입사, 또는 박사 학위 취득이라는 세 가지 진로 중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된다. 공무원을 지원할 경우 성적과 본인 희망에 따라 부처가 결정되며, 이에 따른 실제 업무를 익히기 위해 각 부처별로 운영하는 전문 교육 기관에서 2년 간 연수를 받아야 한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자 하는 지원자는 폴리테크닉 산하 연구소는 물론 국내 대학이나 여러 외부 연구소에서 연구할 수 있다. 사기업체를 택하는 경우 3년 간의 학비 및 봉급에 해당하는 30만 프랑(4천 2백 만원 가량)을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 이 같은 재정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년사이 사기업체로 진출하는 졸업생의 숫자는 줄곧 증가 추세이다(현재 약 50%).

 최근 2 ~ 3년 사이 신문·잡지에 ‘X 출신간부들 실업 급증’ 따위 기사가 소개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기업체에서 거금을 투자해 X 출신을 모셔가던 일은 이제 한낱 추억일 뿐인가. 학교측은 잡지 기사에는 어차피 약간의 과장이 따르게 마련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최고 호황기에 한 학생이 재학 기간에는 평균 5 ~ 6건의 입사 제의를 받았다면 요즈음은 그 수치가 1 ~ 2건으로 줄었을 뿐, 아직까지 X 졸업생 중 첫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례는 없다는 것이다.

 폴리테크닉은 쟁쟁한 교수진과 만족스러운 연구 여건을 밑거름으로 해서 2백 년간 프랑스의 산업 엘리트를 배출해 왔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유럽 및 미국의 다른 대학에 비해 우물안 개구리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지난 3월말 개교 2백주년 기념식에서 미테랑 대통령이 “가까이는 유럽 차원, 나아가서는 국제적 차원으로 학교를 성장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이다. 세계화라는 시대의 조류가 전통이라는 무기만 가지고는 쉽사리 정복되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 상기시킨 말이다.
파리·梁永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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