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 총리 얼마나 버틸까
  • 도쿄.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4.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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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2차 연립정권 간판 따로 권력 따로...“6월게 위기 봉착”



 전직 버스 회사 과장이 일본의 새얼굴로 떠올랐다. 제80대 총리로 확정된 하타 쓰토무(羽田孜)도쿄의 세죠(成城) 대학을 졸업한 후 10년간 오다큐 버스 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이색적인 정치가다.

 부인 야스코(綏子)씨가 《주간 아사히》에 털어좋은 비화에 따르면, 하타 총리는 일류 대학과 취직 시험에 모두 실해판 이른바 ‘인생의 낙제생.’ 때문에 그는 부친이 소개해 들어간 오다큐 회사를 천직으로 알고 월급쟁이로 일생을 마칠 결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가노(長野)2구 출신 국회의원이던 부친이 병석에 누운 후 대를 이어달라는 주위의 권고를 5년 간이나 뿌리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타 총리가 주위의 성화에 못이겨 국회의원에 처음 입후보한 것은 지난69년. 그의 정치적 후견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郎)도 이때 그와 함께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하타 총리의 별명이 ‘팔방미인’스페어 정치가‘라는 것도 이색적이다. 하타 총리는 첫등원 이래 9회 연속 당선을 기록하면서 85년 나가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의 농림수산장관으로 처름 입각했다. 88년의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내각 때 다시 농림수산장관에 임명된 그는 이 때문에 농림수산부문의 정책통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90년 자민당 선거제도조사회 의장을 맡으면서부터다.리크루트 사건의 여파로 정치 개혁이 급선무로 떠오르자 모나지 않은 성격인 그가 우선 발탁된 것이다. 그후에도 그는 이러한 팔방미인격 성격이 평가되어 91년의 미야자와 기이치(官澤喜一) 내각 때는 대장성장관,호소카오 모리히로(細川護熙) 연립정권에서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중용되었다.

‘7인의 사무라이’중 가장 빨리 출세
 그의 팔방미인격 성격이 그의 정치 행로에있어 꼭 플러스 요인만은 아니었다. 자민당의 우노 소스케(宇野宗佑)총리가 게이샤 추문으로 사임한 직후인 89년 그는 처음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다.철렴결백하고 무난한 성품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그는 작년 8월에도 연립정권의 유력한 총리 후뵤였다.

 자민당의 입방아꾼들은 그래서 그를 늘상‘스페어 정치가’로 격하해 왔다. 총리를 확정된 순간에도 ‘ 정치 개혁이란 하나의 주제 정도는 열심히 수행할 인물’ ‘ 관료의 품 속에서 안주할 총리’라는 말로 그에 대한 인물평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도전에서 대망의 총리 자리를 거머쥐었다. 이는 자민당 시절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던 ‘7인의 사무라이’중에서는 가장 빠른 출세이다.

 ‘난세의 오자와,평시의 하타’라는 평가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의 하타가 총리로 등극한데는 오자와와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정계에 입문한 정치 동기생이다. 파벌도 똑같은 다나카파에 속해 있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이 특별히 친근한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던 하타와 오자와가 정치적 동지로 맺어진 것은 두 가지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塋)를 권좌애서 끌어내린 85년의 ‘파벌내 쿠데타’사건이다.
두 사람은 이 때 다케시타를 옹립하는 7인의 사무라이로 크게 활약했다.

 하타가 자민당의 선거제도조사회 회장에 취임한 것도 두 사람의 곤계를 더욱 좁혀준요인이다.소선거구제 도입을 추진하던 오자와에게는 정치 개혁에 열심이던 하타가 더할수 없는 원군이었고,끝내 두 사람은 재작년 12월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생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수인 하타의 사무실이 대표간가(사무총장)인 오자와의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역학 관계는 판이하다. 즉 대주주인 오자와가 신생당의 실질적 경영자라면 하타는 간판 얼굴로 기용된 교용 사장에 불과한 존재이다. 이 때문에 하타 내각은 벌써부터 ‘권력의 이중 구조’가 큰 문제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본의 권력 구조는 역사적으로 상징적‘덴노(天皇)’와 실질적‘쇼군(將軍)’에 의해 양분되어 왔다.자민당 장기 집권 때에도 이런 현상이 뚜렷했다. 예를 들어 록히드 사건에 연루되어 총리 직을 물러난 다나카는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파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당시의 사회당 세력에 버금가는 1백50명의 국회의원을 옹호한 다나카는 이 힘을 바탕으로 29여년 간에 걸쳐 일본 정계를 떡 주무르듯이 해왔다.

 하타와 오자와의 역학 관계로 볼 때 제2차 연립 정권의 운명도 엇비슷하다. 즉 하타는 어디까지나 ‘상징 총리’에 불과한 존재이다. 대신 와자오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해 전권을 휘두를 것이 분명하다.

정책 불일치도 두통거리
 하타 총리에게는 이러한 권력의 이중 구조도 큰 문제지만,연립 정권 내부의 정책 불일치도 큰 두통거리다.호소카와 전 총리가 사임을 선언하고 하타 정권이 탄생하기까지 2주 남짓 정국 혼란이 계속된 것도 바로 이 정책 불일치가 원인이다. 문제는 크게 나누어 한반도 문제와 소비세 인상 문제이다.

 《주간 문춘》최근호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지난 13일 도쿄의 조춍련 중앙회관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82주년 축하연’이 열렸다. 13일이라면 연립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던 때다. 그러한 경황중에도 사회당은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를 비롯한 국회의원15명을 파견해 축하연을 빛내 주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생당측은 안보리에서 제재가 결의되는 경우나 한반도 유사시에 사회당의 명확한 당론이 무엇인지 제시하도록 요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사회당은 △안보리가 제재를 결의하는 경우 그 방침에 따른다 △그 대응은 현행 헌법의 테두리를 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제시했으나,관계국과의 협조 문제에서 일?중 간의 협조‘문제는 ’아시아 관계 각국 간의 협조‘로  표현이 바뀌었지만, 실제로 안보리 제재가 취해질 경우 사회당이 이를 용인할지에 대해서는 이 합의만으로는 아직 불투명하다. 따라서 하타 정권은 안보리가 제재를 결의하는 순간정권 내부의 혼란으로 굉음을 내고 무너진다는 것이 대다수의 관측이다.

제2차 정계 재편 가속화할 전망
하타 정권은 또한 소비세 인상 문제로 단명 내각으로 그칠 것이라는 것이 일본 언론들의 한결같은 예측이다. 사회당은 정책 협의석상에서 소비세 인상에 ‘ 국민간 합의’를 요구했으나,신생당과 공명당은 그런 절차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비세 개폐를 포함한 인상 문제는 하타 정권이 경기 대책, 흑자 축소 대칙을 마련하는 데 초미의 과제이다. 따라서 소비세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6월게 하타 연립정권은 또다시 큰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설령 연립여당이 한반도 문제가 소비세 문제에 합의를 도출하는 경우에도 하타 정권이 장기 본격 정권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즉 소선거구제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선거 제도에 의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총선거를 치를 겨우 그 역할이 끝나는 시한부 내각이라느 얘기다.

 일본 언론은 이에 따라 제2차 정계 재편을 위한 합종연횡이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내다본다. 제1차 정계 재편의 축이 자민 대 비 자민이었다면 이번에는 호헌 대 개헌이 그축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자민당의 2차 분열, 사회당의 양분이 예상된다.
일본에 자민당 안정 정권이 들어선 것은 폐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였다. 자민당 정권이 붕괴한 지금 일본 정국은 적어도 금세기 말까지 유동 상태를 지속하게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도쿄. 蔡明錫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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