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쇼군’오자와 1인 천하
  • 도쿄.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4.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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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마루 등 거물이 후견인 ...정책 능력도 탁월

땅딱말한 키, 네모꼴의 넙죽한 얼굴, 좀처럼 웃음을 흘리지 않는 무뚝뚝한 표정. 이것은 일본 정국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가는 현대판 ‘야미 쇼군(闇將軍)’ 오자와 이치로 신생당 대표간사가 주는 첫인상이다. 때문에 그는 호소카와 모리히로나 하타 쓰토무와 같이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정치가는 결코 아니다. 나이로 따져도 그는 아직 50대 초반이다.

오자와는 이번 정변뿐 아니라 자민당 장기 정권의 붕괴, 연립 정권 탄생으로 이어진 작년의 지각 변동을 이끈 주인공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가 주도한 신생당은 자민당?사회당에 이은 제3의 세럭에 불과하다. 일본의 정치판이 ‘숫자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게다가 오자와는 신생당 당수 지위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시쳇말로 ‘오자와가 뭐길래’ 일본 정치가 오자와 한 사람에 의해 요동치는 것인가. 또 오자와 정치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 런던 대학 교수의 《영국과 일본》이란 책에 따르면, 영국보다 더 심한 계급 차별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예를들어 유명한 우동집이나 횟집은 몇 대째 대물림해 오는데, 이것은 직업 변동이 그만큼 제한되어 왔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이러한 계급사회는 정치의 세계에도 존재한다. 선거구를 조부나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아 정계에 입문한 이른바 ‘세습 의원’ ‘2세 정치가’ 들이 바로 그 산물이다. 오자와의 정치력도 따지고 보면 그가 2세 정치가라는 점에 있다.

정치적 대부 다나카를 밀어내는 냉혹함도
 오자와는 게이오 대학 경제학부를 거쳐 니혼 대학 대학원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27세 때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운수성장관 등을 역임한 부친이 급사 함에 따라 동북지방 이와테(岩手) 2구 선거구를 물려받은 것이다. 이후 9회 연속 당선을 기록하면서 오자와의 정치적 출세가 시작된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은 내각책임제를 실시하고 있다. 따라서 당선 횟수에 따라 정치가의 위상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자민당 정권시절에는 당선 횟수 3~4회에 정무차관, 5~6회에 장과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오자아도 이에 따라 85년 자치장관, 87년 관방장관에 기용되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89년 가이후 도시키(海部後樹) 내각이 발족하자 오자와는 47세로 자민다 간사장에 발탁되었다.

 자민당 간사장 자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민자당 사무총장쯤에 해당한다. 하지만 역대 자민당총리가 꼭 거쳐야 했던 3대 직위(대장성? 통산성 장관이나 정조회장? 간사장) 의 하나가 바로 간사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자와의 정치적 출세는 이 때 공증 절차를 거쳤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나 2세 정치가에다, 빠른 출세만이 그의 정치력을 뒷받침하는 전부가 아니다. 정치적 대부인 다나카 기쿠에이 전 총리나 정치 후견인 가네마루 신(金丸信)과으이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오자와는 69년 국회의원 당선과 함께 자민당 다나카파에 들어갔다.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던 다나카는 부친과의 인연으로 애송이 정치가 오자와를 친자식처럼 총애했다. 뿐만 아니라 ‘후쿠마 구미’라는 건설회사 사자으이 딸을 그에게 소개해 결혼까지 시켜 주었다.
오자와 역시 다나카를 친아버지처럼 존경했다.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1백91회에 걸친 공판을 한번도 빠짐없이 방청한 정치가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와자와는 그의 정치적 대부 다나카를 권좌에서 밀어낸 냉혹한 일면도 있다. 85명 창정회 사건 때 행동대자으로 활약한 사람이 바로 그다. ‘파벌 쿠데타’로 다나카를 배제한 가네마루?다케시타 노보루?오자와는 나중에 ‘곤칙쇼(金竹小) 체제’를 구축해 일본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곤칙쇼 체제’를 수성한 세 사람은 단지 정략에 의해 뭉친 사람들은 아니었다. 정치 동기생인 다케시타와 가네마루는 장녀와 장남을 결혼시켜 사돈 관계이다. 거기에 오자와 부인의 여동생이 다케시타의 남동생과 결혼함으로써 세 사람은 이전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척 관계로 뭉쳐 있었다.

 그러나 후견인 가네마루가 사가와 규빈 사건에 연루되어 정계를 은퇴함에 따라 한때 그의 정치력은 크게 약화했다. 다나카?가네마루의‘조조 인형’, 금권 정치에 물든 때묻은 정치가라는 평판 때문이었다.

 오자와는 자민당 탈앙이란 극약 처방으로 이 때의 위기를 극복했다. 탈당과 신당 창당 명분은 정치 개혁. 그의 정치 행태에 회의적 시각을 보여온 여론도 이 때를 전해후 그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자민당 장기 정권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그의 행동력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정치적 대부나 후견인이 사라진 지금도 오자와의 영향력은 욱일승천의 길을 걷고 있다. 또 그와 당선 횟구가 비슷한 2세 정치가가 많이 포진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결코 와자와의 적수가 못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유는 그의 탁월한 정책 입안 능력에 있다. 오자와는 작년에 총선거를 앞두고《일본개조계속》이란 정책집을 펴냈다. 이 책의 골자는 2대 정당으로 정계를 재편하기 위해 소선거구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과, 구제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보통 국가’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대목은,한국의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소비세를 대담하게 3%에서19%로 인상하자고 주장하는 점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선거를 앞두고 정치가가 세금 문제를 들먹이는 것은 금울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지론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배짱을 보였다.

‘허헌파’대두하면 양향력 줄어들 듯
 관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가라는 것도 오자와의 큰 장점이다.정책집《일본개조계획》은, 실은 그의 지배 아래 있는 관료들이 대필한 책이다. 일본에서 관료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은 곧 정책 입안을 좌우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이렇게 보면 오자와 정치력의 근원은 다나카?가네마루의 어깨 너머로 배운 정치 수법과,철옹성과 같은 관료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정책 입안 능력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미 국무부의 한 사하 기관이 얼마 전 그의 정책집을 이례적으로 번역하여 관계기관에 배포한 것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사히 신문>이 발행한 《오자와 이치로 탐험》이란 책에 의하면,오자와는 백의 얼굴을 갖고 있는 정치가다.‘백색 혁명가’라는 혹평도 그중의 하나인데,곧 오자와가 권위주의 내지는 권력주의적 정치가라는 얘기다.

 그의 정치 라이벌인 자민당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총재도 작년에 그를 ‘ 위험한 국가주의자’라고 규정했다. 헌번 개정과 자위대 개편을 주장하는 그의 ‘보통 국가론’이 미니 초대국 노선을 지향한다는 비난이다.

 따라서 일본 정계가 만약 개헌파와 호헌파 세력으로 양분된다면 오자와의 정치력에도 한계가 그어질 것이 분영하다. 그것은 개헌파 세력에 버금가는 호헌파 세력이 대두함으로써 오자와의 영향력이 반감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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