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함부로 쓰면 벌금!
  • 파리.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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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어 사용 관련 법’제정 … 음식점 차림표서 문서까지 외국어 남발 쐐기



프랑스에 이민 단속 경찰이 신설된데 이어 언어 감시 경찰이 생겨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올봄 정기국회 개원과 더불어 지난 4월 중순 프랑스 상원은 ‘프랑스어 사용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원 재검토 절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 법안이 실제로 법이 되는 과정에 별 난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제안자인 문화·프랑스어권 지역 장관 자크 투봉의 이름을 따서 간단히 투봉안이라 불리는 이 법안은, 프랑스 내에서는 모든 의사소통이 프랑스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이 말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현재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만 알아서는 불편한 일을 겪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그 예로 투봉 장관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광고, 대중교통 수단 등의 공공장소에 게시되는 각종 벽보, 다국적 기업체들의 고용계약서, 슈퍼마켓에 진열된 각종 수입품의 사용법 및 보증서 등을 꼽는다.

이런 데에서 외국어 사용이 범람한다고 뭉뚱그려 말했지만 영어가 표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순전히 영어만 사용하는 여러 학술모임이나 학회지도 예외는 아니다.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곳에 밀집한 맥도널드류의 간이 음식점 차림표도 투봉 장관의 공격 대상이다. 간단한 일상 소비생활에서부터 사업·교육·문화·연구활동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침투한 영어로부터 프랑스어 사용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의 투봉 법안은 같은 의미의 말이 프랑스어에 존재할 경우 외국어 사용을 금하고 프랑스어 사용을 의무화할 것을 명문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거나 오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외국어 3천5백 단어를 프랑스어로 옮긴 사전도 이미 편찬되었다.

미테랑 “나도 모르게 영어 써도 감옥가나?”
이 법안이 상원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각료회의에 처음으로 상정된 2월 이후 텔레비전 뉴스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인사들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한 가지 더 첨가되었다. 바로 프랑스어 어휘력 평가이다. 예컨대 지난주, 시청률이 높은 일요일 저녁 시사대담 프로그램에서 프랑스의 최고 인기 여성 앵커인 안 생클레르가 초대 손님으로 나온 상공장관에게 영어 약자인 GATT를 프랑스어로 풀어보라는 문제에 이어, 자동차 핸들에 부착하는 에어백(air bag) 장치를 올바른 프랑스어로 옮기라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결과는 반타작. 제안자인 투봉 장관 자신도 마케팅(marketing)을 프랑스어로 옮기느라 고전했으나 애석하게 실격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이밖에도 대담중 무심코 튀어나오는 ‘챌린저’‘리더’‘페널티’‘로열티’ 같은 단어 때문에 경고장인 옐로 카드를 서로 주고받는 장면도 이 법안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희극이었다. 각료 회의 당시 미테랑 대통령이 “나도 모르게 영어 단어를 썼을 때 감옥에 가야 한다는 말이냐?”고 은근히 비꼰 일화는 유명하다. 일상 회화는 순화 대상에서 제외되는 만큼 미테랑 대통령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투봉 장관 측근들은 법을 어기는 자에 대한 처벌이 엄해야 효과가 있으리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아직 세칙은 발표하지 않았지만 범법자에게는 상당한 벌금을 물리리라는 추측이다. 그렇다면 누가 위반자를 색출할 것인가. 언어 감시 경찰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발상이 운위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프랑글레(프랑스어와 영어를 혼합한 말)의 범람을 막아야 한다는 움직임은 프랑스에서 이미 60년대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있어왔다. 에티앵블의 《당신도 프랑글레로 말합니까》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였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언어학자 클로드 아제쥬 같은 이는 전체 어휘의 10% 이상이 외국어로 구성될 때 비로소 언어 침입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프랑스어의 경우 현재로서는 영어 단어가 조미료를 치는 정도에 불과할 뿐 차용정도가 위험 수위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지적한다. 법을 시행하면 당장 국제 규모의 학회를 유치하거나 수출입 업무를 보는 데 지장이 있으리라는 경제 관련 부처의 계산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새로이 법을 제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더구나 시행령 및 처벌 조항이 없어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나 이미 75년에 비슷한 내용의 법이 정해진 터이므로 이에 대한 의문은 더욱 크다.

“언어는 국사(國事).” 투봉 장관이 상원의원들에게 제안 설명을 하면서 못박았듯이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에 보이는 애착이 유별나다는 점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 덕분에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영어로 길을 묻는 외국인에게는 영어를 알아도 대답 안 하는 민족이라는 말이 붙어다닌다. 실제로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그 나라 말 한두 마디 정도로 성의를 보이는 관광객은 환대 받기 마련인데 유독 프랑스에서만은 사정이 다르다.

프랑스 사람 사고방식으로는 프랑스에 발을 디디는 사람이면 누구나 프랑스어는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이 언어에 쏟는 관심은 역사적 사실에서도 쉽게 찾아진다. 이미 1510년 루이 12세가 사법 개혁에 관한 칙령을 발표하면서 모든 수사는 ‘백성들의 말’ 즉 프랑스어로 행해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당시 식자층에게만 통용되던 라틴어 사용을 제한하는 정책의 효시였다. 중국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시기보다 약간 늦긴 하지만 거의 엇비슷한 시기이다. 그 후 1539년, 프랑스의 문예부흥을 이룬 왕으로 평가되는 프랑소와 1세는 법령 및 사법에 관한 모든 절차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도록 지시함으로써 프랑스어 사용 범위를 확대했다. 뒤벨레·롱사르 등 16세기 프랑스문학사를 장식한 시인들이 라틴어 작가에 대항해 프랑스어 옹호를 주장하면서 신·구 논쟁을 벌인 것과 같은 시기이다. 이는 한글 창제 당시, 언문 사용 반대를 주장한 최만리 같은 이들과 집현전 학자들 간의 대립과 비교할 만하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리슐리외 재상은 유명한 프랑스 한림원을 세웠으며, 프랑스어의 규범을 정한다는 한림원의 전통은 지금까지 사전 편찬이라는 형식을 빌려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영어’라는 공룡을 향한 프랑스식 저항
프랑스 한림원에 해당하는 언어정화기구가 없는 영어권 지역 출신 사람 중에는 한림원의 존재야말로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라틴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리적이고 개방적인 앵글로색슨 문화와는 큰 차이가 있다. 투봉 법안의 향방을 관측하는 유럽 및 미국 언론의 반응이 바로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들은 작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협상 자리에서 프랑스가 극구 주장한 ‘문화는 예외’라는 슬로건이나 이제 그 후속타로 띄우고 있는 ‘언어는 국사’라는 믿음의 저변에는 미국이라는 골리앗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다윗의 초조한 심정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서 영어가 나날이 국제 무대에서 통용되는 거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군림하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프랑스어가 과거에 누렸던 영화를 빼앗기는 데 대한 반작용이 이같은 시대착오적 법안을 낳았다는 비판이다.

나라말의 건강 여부는 국운을 재는 잣대라는 강박 관념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이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는 지적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영어라는 특정 언어가 세계 언어로 군림하는 데에서 오는 위헌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비단 프랑스어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소수 민족의 언어 모두에 가해지는 공동의 위협임을 부각하려 했다는 점에서 투봉 법안은 시대착오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미래지향적이라 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법안 심의 과정에서 프랑스 상원의원들은 물론 모국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자라나는 세대에게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를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도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문화 예외’ 노선의 주축이었듯이, 영어 아닌 다른 언어도 살아야 한다는 경각심이 투봉 법안의 핵심일 수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가 먼 나라 소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제로 수평 이동될 수도 있다. 전국 곳곳에 빼곡이 들어찬 국적 불명의 간판, 한글이라고는 한 자도 찾아볼 수 없는 옷가지와 장난감·학용품 등의 범람을 보며 우리말의 미래는 과연 낙관적인지 한번쯤 자문해볼 필요는 없을까. 섣부르게 영어 단어를 섞어쓰는 것이 국제화에 발맞추는 길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투봉 장관은 경고했다. 모국어를 바르게 구사하는 사람만이 외국어도 정확하게 잘 배울 수 있다는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지적 또한 더 늦기 전에 되새겨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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