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양김시대… DJ는 ‘고감도’
  • 서명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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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더 커진 김대중은 정계에 복귀하는가

金大中 전 민주당 대표의 정계 은퇴선언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는 현실 정치에서 과연 명백히 자유로운가. 그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 만약 정계로 복귀한다면 언제쯤, 어떤 수순을 밟게 될 것인가.

 정치권과 국민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김대중 아시아ㆍ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을 향해 다시금 갖게 된 궁금증이다. 정계를 떠난지 1년 6개월. 정치와는 한동안 무관하게 비치던 그를 향해 새삼스레 이런 질문들이 제기되는 까닭은, 최근 여야가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였던 ‘DJ 정치 개입설’ 때문이다.

 발단은 김이사장이 지난 4월말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에, 김현철씨의 정치 자금 수수 의혹설과 관련해 측근들에게 던진 한마디 말이었다. “아들 문제로 아버지를 직접 치고 나가는 것은 혈육의 정에 유난히 강한 동양 사람들 정서에는 잘 맞지 않는 것 갔다.…이 문제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싶다.” 독재 정권아래서 온 가족이 고통을 겪었다는 자신의 경험담을 함께 섞은 DJ의 언급은 즉각 정가에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다.

 민자당 河?? 대변인과 文正秀 총장은 각각 “국회를 파행시킨 것이 이기택 대표의 지시인지 김이사장의 사주인…”(하대변인) “김씨의 이중 플레이”(문총장)라면서 그동안 금기시돼 왔던 김이사장을 직접 거론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른바 ‘DJ 정국 사주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민주당의 거칠고 직접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동교동측이 모종의 비상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관측도 흘러나왔다.

‘정치 개입’ 공방은 되살아날 불씨
 여야 정치권의 가장 민감하면서도 은밀한 관심사는 모처럼 수면 위로 올라와 파동을 일으켰으나 지난 7일 민자당의 대변인 전격경질 조처로 다시 가라앉았다. 대변인 경질은, 한발짝 더 나가면 서로가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는 점에서 상도동과 동교동 간의 인식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DJ 정치 개입‘ 공방전은 그러나 김이사장의 한마디와 민자당 대변인의 한토막 성명 때문에 야기된 돌출 사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계속돼온 상도동과 동교동이라는 양대 정치 산맥의 갈등과 대립구도, 김대통령의 현실 정치와 김이사장의 비정치적 행보 간의 아슬아슬한 균형과 긴장이 필연적으로 빚어낸 결과라는 것이 정가의 시각이다. 따라서 민자당 대변인을 속죄양으로 삼은 채 파문이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그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고, 언젠가는 재연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권력의 획득 유지 및 행사를 위한 투쟁이나 조종 등의 여러 현상 ’이다. 정치 활동은 사전적 의미를 실현하는 여러 행위를 말한다.

 DJ는 과연 정치 활동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를 둘러싼 상도동과 동교동의 인식은 극도의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상도동측은 지난해 정기국회 당시 민주당이 안기부법 개정과 예산안 처리 연계 전술을 구사할 때 이미 ‘DJ의 야당 개입’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 의구심은, 현정부가 우루과이 라운드 재협상 파문, 상무대 비리, 조계사 사태 폭력 진압 시비, 이회창 총리 경질 파문 등 연이은 악재로 휘청거리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상도동의 한 핵심 실세는 “김이사장이 상무대 국정조사권 발동, 특위 구성, 참고인 선정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개입한 흔적이 역력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따라서 김이사장의 발언은 ‘뒤에서 대치 국면을 조성하고 앞에서는 어르는 전형적인 이중 플레이’라는 것이 상도동의 상황 인식이다.

 그밖에도 상도동은 김이사장의 호남 방문, 비주류 중진 의원들과의 식사 등 최근 행보가 명백히 정치 활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고 있다. 상도동계의 한 핵심 인사는 “민주당의 실체는 여전히 DJ다. DJ는 당내 측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당을 통제 장악하고 있다. 꼭 배지를 달고 당직을 가져야만 정치 활동인가. 이것이야말로 명백히 정치 활동이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동교동 쪽은 DJ 정치 활동 개입설은 현정권의 DJ 콤플렉스를 반영하는 것이며, 현정권의 위기를 DJ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張誠珉 공보비서는 “현정권은 여당 내부에 위기가 발생하면 수구 보수세력의 저항을 막고 개혁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DJ를 끌어들여 왔다. 반면 야당으로부터 공세를 당하면 사주설 등을 의도적을 유포해 자신들의 정치력 부재에서 생신 딜레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 집권 여당의 정치는 ‘DJ 콤플렉스의 정치’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동교동은 상도동이 이런 주장을 통해 DJ에게 흠집을 내고, 야당을 분열시키고, 위기를 전가하는 다목적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고 있다.

‘DJ의 알리바이’ 상당 정도 충족
 이런 상반된 주장과 인식 속에서 DJ의 정치활동 여부를 가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민주당 비주류로 분류되는 한 중진 의원의 언급은 이런 뒤엉킨 주장 속에서 하나의 판단 근거를 제공한다. 이 의원은 “DJ가 측근들을 통해 당에 개입하고 있다고 하지만, DJ 자신의 행위라기보다는 그를 업어야 당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측근들이 자구책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그 자신은 현실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90% 정도는 지켜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치인들과 만남이나 원론적인 수준의 언급까지 문제삼는다면, 40년간 정치 속에서 인연을 맺고 호흡해온 그에게 숨쉬는 일만 하라는 것과 진배없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동안 DJ의 표면상 활동도 ‘정치활동과 무관하다’는 알리바이를 상당 정도 충족시키고 있다. 올해 들어 대학 강연회ㆍ독자 사인회 등으로 활동량을 부쩍 늘리고 활동공간을 대폭 넓혔지만, 자신의 정치 기반인 광주와 목포는 끝내 방문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교유하고 접촉하는 범위도 지나치리만큼 면밀히 제한되고 있다. 1주일에 3명꼴로 정치학ㆍ사회학ㆍ역사학ㆍ농업학ㆍ국제정치학ㆍ동아시아 지역학ㆍ미래학 학자들과 만나 장시간 토론을 벌이면서도, 정작 정치인들은 일부 측근을 제외하고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삼고초려해야 겨우 면담이 허용되는 정치인이나 언론인의 경우, 아ㆍ태평화재단이나 동교동 자택에만 출입이 허용되고, 칩거와 비정치의 상징인 일산 자택에 출입이 허용되는 것은 비서와 학자들뿐이다. 그래서 ‘DJ를 가장 만나기 쉬운 사람은 대학생과 학자’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다. 이렇듯 그는 철저하게 비현실적인 분야에서만 활동하고, 남북관계와 북한 핵 문제 그리고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관련된 발언만 한다는, 이른바 ‘초현실정치와 국제화 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정가의 관심이 여전히 유지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정치 일선을 떠나긴 했지만, 이런 ‘비정치ㆍ국제화’ 분야의 활동을 통해 국민적 영향력이 더 높아지고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정치 평론가는 이런 현상을 놓고 “당내 결정권이 없어짐으로써 정치적 장악력은 다소 떨어졌지만 사회적 영향력의 범위는 훨씬 넓어 졌다”라고 진단한다. 물론 당내에서의 영향력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비정치 분야의 활동에서 그는《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라는 베스트 셀러의 저자로, 새로운 관심사로 부각된 남북 문제와 핵 문제의 가장 권위 있고 인기 있는 강사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4월23일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의 중고교생 독자를 위한 강연회 및 사인회에는 7백명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제주도와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온 극성 팬들도 끼여 있었다. 강연이 끝난 뒤 책 사인회는 밤 8시까지 계속됐다.

 정치 대신 새로운 화두로 붙잡은 통일과 아시아 평화 문제 역시 그의 영향력을 유지, 확대시키고 있다. 20여 년간 남북 관계와 통일 문제에 매달려온 그는 일찌감치 “핵문제를 푸는 길은 일괄타결밖에 없다”라고 주장해 왔고, 현재 미국과 북한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 간의 핵 협상은 ‘포괄적 타결’의 기조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는 미ㆍ북한 고위급 회담과 특사 교환의 연계 고리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도 일찌감치 전개했는데, 정부는 오랫동안 갈팡질팡한 끝에 끝내 특사 교환의 고리를 풀었다. 북핵 문제와 남북 관계에 대한 김이사장의 전문성과 장악력은 일반인들에게도 강력하게 인식되고 있다.

정부 신경 건드리는 발언들
 이런 흐름은 김이사장 진영을 고무시키는 쪽을, 현정부에게는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초조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핵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중국 카드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제주도 발언을 시작으로 벌목공 문제, 북한 핵 문제, 특사 교환 문제에 대해 정부와 다른 의견을 활발하게 제시하기 시작한 것도 현정부의 신경을 건드린 대목이다.

 DJ는 올 들어 국제 사회에서의 걸음 속도를 빨리하고 있다. ‘평화, 군축, 그리고 공존’이라는 제하의 토론회에 참여하기 위해 4월27일~5월1일 필리핀을 방문한 그는 라모스 대통령ㆍ하이메 신 추기경ㆍ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을 만났고, 여기에서 아시아 지역의 다자간 안보체제를 제의했다.

 정치 개입설의 여진을 뒤로 하고 지난 5일 20여일 간의 미국 방문을 위해 출국한 그는 12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 기자회견에서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하리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상도동측은 “김이상에 대한 국제 언론의 관심은 이미 사라졌다”라며 미국 방문의 의미를 애써 평가절하하면서도, 김이사장의 발언 내용에 내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민자당 김종필 대표가 'DJ 정치 개입설‘의 와중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통일류의 이야기를 마구 지꺼리는 사람이 있다”면서 김이사장을 겨냥한 발언을 한 것도, 그의 발언에 앞서 미리 흠집을 내려는 고단수 전략으로 풀이되고 있다.

광범위한 영향력 추구하는 ‘고단수 전략’
 이렇듯 DJ는 현실 정치에는 거의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유지하는 대신, 비정치 분야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심으면서 대중적 인기를 넓히고 국제 사회에서는 ‘과거의 민주화운동 지도자’에서 ‘평화와 인권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한 정치 평론가는 “현실의 권력에 직접 개입하고 이를 추구하는 정치가 하위의 정치(low politics)라면, 광범위한 정치치적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은 상위의 정치(high politics)다. DJ는 상위의 정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독일의 브란트 전 총리나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권부를 떠나 있으면서도 이런 ‘하이 폴리틱스’로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정세 분석통은 "YS는 국정을 맡은 만큼 현실 정치에서의 부담과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DJ는 그런 부담과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점수를 딸 수 있는 상황이다“라고 말한다.

 DJ가 구사하는 ‘하이 폴리틱스’. 현실과 거리를 둔 채 영향력을 보존하고 확대하는 ‘고감도 정치’는 다시금 정계로 돌아오기 위한 고도의 전략인가, 아니면 그가 공언한 대로 ‘역사에 씌어질 또 다른 페이지’를 위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변신인가.

 지금 결론을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 자신도 결론을 내리지 않은 일인지 모른다. 설령 그가 현실 정치 복귀를 꿈꾼다 하더라도, 다시 건너오는 길목에 넘어야 할 장애물은 많다. 영향력의 범위가 더 넓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 정치와는 무관하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니만큼 정치적으로 치환되면 현저하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여야의 인물 부재론, 남북 관계의 진전 가능성, 통일문제와 첨예한 국제적 이해관계에 정통한 지도자의 필요성, 확인할 수 없는 DJ의 속마음 등 여러 가지 정황 논리와 시대의 흐름은 ‘DJ 복귀설’을 정치권에 묶어 두는 복합 요인이 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DJ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신 양김시대’라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DJ의 정계 은퇴 때와 영국에서의 귀국 당시만 해도 언론은 ‘좌화와 협력의 신 양김시대’를 점쳤다. 개혁 정국 1년은 적어도 그런 양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 파동은 신 양김시대의 근본 구조는 여전히 ‘갈등과 경쟁’이라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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