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 정리’ 노동계 재편 깃발 올랐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4.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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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위노조, 노총 탈퇴…‘제2 노총’ 겨서 박차

만국의 노동자 잔칫날인 5월1일 노동절을 전후해서 한국 노동운동계가 일대 지각변동 조짐을 보이고 있다. 숱한 고난과 역경을 헤쳐온 한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법과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약 48년간 편안하게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한국노동조합총연맹(노청ㆍ위원장 박종근)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4월24일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이 노총 탈퇴를 결의한 데 이어 27일 대우그룹노조협의회(대노협), 29일 한진중공업, 30일 한라중고업이 꼬리를 물고 노총을 떠났다. 아세아자동차와 기아자동차도 5월중에 노총 탈퇴를 결의할 예정이다.

 덩지 큰 대기업 노조들이 속속 노총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게다가 이에 앞서 현대중공업ㆍ대우조선 등 6개 대공장 노조로 구성한 조선업종노조협의회(조선노협)와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 전국과학기술노조도 노총 탈퇴를 결의했다. 이들은 노총과는 별도로 상급단체인 산별노조를 구성할 예정이다. 이러한 노총 탈퇴 움직임은 앞으로 더욱 번질 전망이다. 노총의 48년 독점을 뒤흔드는, ‘노동계 재편’의 징후가 보이는 것이다.

 노총 탈퇴 바람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 현재로서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사실 노동운동계에서는 진작부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금성장한 이른바 재야 민주노조들과 성향이 전혀 다른 노총이 ‘불안한 동거’를 시작한 이래, 이들의 갈라서기는 시간 문제였을 따름이다. 그것이 공교롭게 35년 만에 부활한 첫 노동절을 맞이해 불쑥 노동계의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민주노조 세력의 결집체인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와 노총은 5월1일 제각각 노동절 행사를 치렀다. 해마다 반복된 일이지만 올해 유독 언론의 눈길을 끈 까닭은, 따로 벌인 반쪽 행사가 노동계 세력 재편의 서곡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재야 노동단체, 법적 지위 확보 눈앞에
 이번 탈퇴 사태를 놓고 전도내 쪽에서는 성급하게 ‘노총 몰락’을 점치기도 하는 반면 노총 쪽에서는 ‘어차피 떠날 사람들’로 평가 절하한다. 여하튼 양쪽 모두 “복잡한 호적을 정리한 것”이라는 데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출생 배경이 달라도 오직 한 아버지만 인정했던 노동법이 개정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즉 국내외에서 노동법 독소 조항으로 비난받아온 노동법 3조 5항 (복수노조 금지 조항; ‘조직이 기존 노동조합과 조직 대상을 같이하거나 그 노동조합의 정상적 운영을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새로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멀지 않아 폐지 또는 개정될 운명에 처했다는 얘기다.

 그동안 모든 노동조합은 노조 설립신고 때 반드시 상급 단체를 명기토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87년 이후 태동한 노동조합은 법적 인정을 받기 위해 불가피하게 노총 산하산업별 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예를 들어 현대중공업은 실질적으로는 현총련에 소속돼 활동해 왔지만, 법적으로는 노총 산하 금속연맹 소속이었다. 한마디로 법이 아버지를 지정해주는 상황이어서, 이른바 민주노조들은 저마다 복잡한 호적을 간직하고 있어야 했다. 물론 언론노동조합연맹이 92년 12월 대법원에서 각 언론사 노조의 상급 단체로서 합법 판결을 받은 이후 민주노조들이 노총 산하 산업별 연맹이 아닌 자가 호적을 찾을 여건이 마련되긴 했지만, 대다수 노조는 법적으로 여전히 노총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왔다.

 92년말 현재 노총 가입 노동자 수는 약 1백73만명. 이 가운데 맹비를 내지 않아 조직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지 않는, 말하자면 법적으로는 노총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따로 노는’ 이탈 노동자가 대락 68만명쯤 된다. 그리고 이 68만명 가운데 전노대 소속이 45만명이다. 즉 이번에 노총 탈퇴를 선언한 노동조합들은 노총과 전노대 양쪽에 적을 두고 있던 조직이다. 겉으로는 말 그대로 호적을 정리한 것뿐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이번 노총 탈퇴를 둘러싼 노동계 환경이 예전과는 판이해졌기 때문이다.

 노동계 환경변화의 한가운데 노동법 개정안이 있다. 92년 4월부터 노동부로부터 노동법 전반에 관한 개정안을 위임받은 ‘노동관계법 연구위원회 기초 소위’는 올해 6월까지 노동부에 개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위원회는 이번 개정안에서 그동안 국제조동기구(ILO) 등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얼굴에 먹칠을 해온, 복수노조 허용 금지ㆍ제3자 개입 금지ㆍ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싹 뜯어고쳤거나 부분적으로 손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재야 노동운동계가 끊임없이 요구해온 것을 정부가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형국이다. 거스를 수 없는 국제적인 흐름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개정안은 집단적 노사관계법에서는 노동운동계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개별적 노사관계법에서는 ‘변형 근로 시간제’ 등을 도입하는 식으로 기업 쪽의 요구를 반영할 전망이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력 수급 구조를 유연하게 함으로써 기업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뜻이다. 이는 당장 노동 현장에 고용 불안을 야기해 또 다른 쟁점이 될 것이다.

 여하튼 현재 노동계 재편을 불러올 쟁점인 ‘어디까지 복수 노조를 허용하느냐’는 문제에서 이번개정안은 개별 단위노조는 현행대로 두고 상급 단체로만 제한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돼도 그동안 법외 단체였던 조선노협ㆍ전노대ㆍ전노협ㆍ 등 재야 노동운동 단체가 합법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즉 전노대가 꿈꾸는 민주노총 탄생이 ‘법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바야흐로 2개의 노총이 존재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전노대ㆍ전노협 등은 그동안 정부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왔지만 이미 사회적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번 사태의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다. 노총 탈퇴와 북수노조 허용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법외 단체에 머물렀던 재야 노동운동 단체들이 이러한 노동법 개정 움직임을 타고 노총에 버금가는, 정부와 기업의 또 다른 상대자로 명실공히 떠오른다는 데에 이번 사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48년 걸친 노총의 독점적 지위가 허물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해석이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당장 노동부가 전노대 등 재야 노동운동 단체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남재희 노동부장관은 취임 초기부터 대법원의 합법 판결을 받은 병원노련 등 6개 노련 대표들과 회동했고, 비노총 계열이대분인 30개 대기업 노조위원장을 연쇄적으로 만났다. 남장관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노동부안팎에서는 “더 이상 노총만을 상대해서는 노동운동 자체를 통제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전노대 등의 실체를 인정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돈다. 가뜩이나 노총이 청와대와 직거래하면서 남장관을 따돌린다는 시각이 노동계에서 꽤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노동부가 비노총 조직을 실체로서 인정하는 행보를 취하면서 요즘 노동부와 노총 간에는 미묘한 냉기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노총은 남장관 퇴진 운동 준비”
 올해 노총은 노동절 기념행사 비용으로 노동부에 5억원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노동부는 대폭 줄여 7천여만원만 지급했다. 장기적으로 노총과의 독점적인 밀월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포석으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이미 남장관은 “문제가 있는 노조에 대해서는 업무조사권을 발동하겠다”며 노총의 반발을 겨냥한 발언을 했었다.

 밖으로 주무 부처인 노동부와의관계가 전에 없이 서먹해졌고, 안으로 내부 조직 이탈에 시달리는 노총으로서는 여러 모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총이 남장관 퇴진 운동을 준비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급기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94 노동절 기념대회’에서 박종근 노총위원장은 기념사 도중에 “일부 언론에 노총을 탈퇴했다고 보된 몇몇 대기업 노조는 원래부터 우리 하 조직이 아니었다”면서 노총 산하 조직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이며 집안 잔칫날 식구 단속을 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노총이 처한 피곤한 사황과는 달리 전노대 측은 발빠르게 민주노총을 건설하기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우선 전노대내 소속단체 별로 ‘민주노총 건설 초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업종회의는 5월 말까지, 전노협은 7월 말까지 초안을 제출할 예정이고, 8월말 전노대 단위노조 대표자 수련회에서 이를 구체화할 방침이다. 전노협 정책반에서 이것을 세밀히 다듬고 올해 안에 가칭 ‘민주노조총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늦어도 95년 내에 제2 노총 격인 민주노총을 띄우겠다는 포부다. 설사 복수노조 금지 조항 등 노동법 개정이 늦춰지더라도 일단 조직부터 만들겠다는 태세다. 즉 ‘선 조직 건설, 후 합법성 재위’ 수순을 밟겠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80년대 내내 정부의 탄압에 맞서 터득해온 이들의 운동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정이 꼭 전노대측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민주노총이 노총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려면 조직 확대가 불가피하고, 이는 바로 대대적인 노총 탈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노총 탈퇴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마음은 콩 밭에 가 있는’ 세력들이 호적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노대측의 향후 과제는 노총에 꼬박꼬박 맹비를 내온 노총 소속 노조를 어느 정도 끌어들이느냐 하는 점이다. 다름 아닌 이 지점에서 노총과 전노대측은 한판 싸움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노총 박종근 위원장의 5월1일 발언도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자칫하면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전체 노동운동계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한 노동운동 전문가는 “일단 대기업 노조 중심으로 민주토총이 발족하면, 상대쪽에 참여해야 유리한지 손익계산을 한 뒤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즉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 노조’가 양산되고,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느 쪽에서건 무리수를 두면 오히려 노동운동이 국민적 신망을 잃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吳民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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