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영은 시스템으로
  • 지만원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장) ()
  • 승인 199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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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할 일은 목표 제시 … 비서실은 ‘설계도’ 따라 움직여야


 텔레비전 카메라가 출동해서 사회적 병리 현상을 조명해 주면 어떤 것들은 즉시 해결되지만 어떤 것들은 여러 번 조명해 주어도 해결되지 않는다. 일개 장관의 말 한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단답형 문제는 즉시 해결되지만 수돗물이나 유통구조처럼 다수 장관이 동시에 관여하는 시스템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대통령에게 시스템 경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비서실에 시스템 통합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에는 참모가 2백명 정도 있다. 이들은 시스템을 통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합철자들이다. 시스템 통합자들은 설계도를 그려 가지고 수많은 부품을 조합해서 제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합철자들은 설계도 없이 분해된 부품을 목걸이처럼 연결할 뿐이다.

 대통령은 과학 부처에 가면 과학이 살 길이라고 강조한다. 교육 부처에 가면 교육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예산은 경제기획원 사무관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편성할 뿐이다. 북한 핵에 대해서도 대통령의 소신은 여러 번 변했다. 일본에 가서는 강경론, 중국에 가서는 유화론, 귀국해서 미국 관리를 만난 후에는 다시 강경론으로 변했다.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들은 지식’에 따라 국가를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 개발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인사=만사’는 구시대 개념
  과거 수십 년간 우리 은행에는 질서가 없었다. 어느날 은행에 대기 번호표 시스템이 생겼고 은행 질서가 훌륭해졌다. 그 간단한 번호표 시스템 하나만 만들면 될 것을 가지고 우리는 그동안 국민 의식을 탓해 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의식 개혁 대상이라고 생각해온 것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시스템 개혁 대상이다. 그러나 시스템에 착안하지 못한 청와대는 의식 개혁에 기대를 걸고 있다. 동쪽에 나타난 고래를 잡는다며 서쪽에 그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 대통령은 국가를 ‘경영’한다. 그러나 후진국 대통령은 국가를 ‘통치’한다. 문제는, 통치되는 사회는 경영되는 사회와 경쟁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엄청난 국민 에너지가 있다. 이 에너지를 뜻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표가 제시돼야 한다. 에너지를 목표지향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시스템과 지도력이 필요하다. 이는 국가 경영의 기초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초 상식은 무시되고 그 대신 ‘인사가 만사’라는 기상천외의 통치 개념이 국가 경영의 방법론으로 등장했다. 대통령에게 인사가 만사면 그를 존경해야 하는 장관들에게도 인사가 만사다. 그러나 장관들은 마음대로 공무원을 갈아치우지 못한다. 결국은 대통령에게만 인사가 만사다. 이는 ‘오야’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 권력을 의미한다. 역사의 바늘이 구한말로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 경영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끊임없이 목표를 제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비전이 없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도 훌륭한 목표를 제시할 수 없다. 케네디 대통령은 인공위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달에 사람을 올리라고 명했다. 과학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이팅 !’보다는 일하는 방법이 중요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를 세웠다. 소총과 대포를 갖다 놓고 ‘이것이 소총이고 저것은 대포다. 똑같은 것을 만들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엄청난 과학자들과 예산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목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류시설을 갖추어 주고 과학자들에게 대우를 해주면서 ‘무언가 유익한 것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부탁하면 아무 것도 안 나온다. 박대통령은 대전 연구소에 전방지휘소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곳은 파티장으로 변했다. 지금은 아무도 그곳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을 외치고 무한 경쟁을 외치지만 국민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또렷한 목표를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국토 건설 목표를 설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토는 중구난방 식으로 파헤쳐지고 먹을 물이 없을 만큼 황폐되고 있다. 온 사회에 시스템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기준도 없이 몇 사람 잘라 놓고 그것을 개혁인 줄로 알고 있다. 취임 초기에는 공무원에게 채찍을 주더니 요즘은 당근책으로 돌아 90만 공무원 집단에 대해 지도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협상을 하고 있다.

 청와대는 시스템의 화신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일이 터질 때마다 상황 처리 차원에서 ‘들은 지식’을 가지고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내시 체계’가 있을 뿐이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청와대가 일하는 방법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법을 모르면 매일 같이 ‘파이팅 !’을 다짐해도 소용이 없다.
지만원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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