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화는 ‘춘몽’ 이었나
  • 프랑크푸르트ㆍ허 광(자유 기고가) ()
  • 승인 199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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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사회주의 곳곳서 권토중래…“개혁을 디시 개혁하라”



 최근 동유럽 정세는 4년 전에 사라진 듯한 사회주의자들이 다시 실지회복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 다시 권좌에 올랐고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서는 막 권력을 넘겨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동유럽에서 투표가 있을 때면 개혁파들이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부활을 경고하거나 ‘과거의 억압자’들에게 표를 모아주는 선거 결과에 대해 유권자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나서던 일도 지금은 흔치 않게 되었다. 동유럽 사회주의는 자기의 과거에서 충분히 배워 다시 역사 무대에 나서고 있는 것일까.

무능과 부패에 국민들 질식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을 기준으로 삼아 동유럽 각국의 최근 정세를 둘러보면 먼저 4개국가군이 떠오른다. 그 첫째 군에 속하는 나라는 에스토니아ㆍ체코ㆍ슬로베니아이다. 이 세 나라는 과거의 공산당에 이렇다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서유럽으로 흡수ㆍ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나라 자체가 작아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데서 오는 문제 전체를 살펴보기가 쉽고, 산업ㆍ기술 수준에서는 동유럽내의 선진국이라 하리만큼 서유럽과 격차가 크지 않다. 언어ㆍ인종ㆍ국경ㆍ투자 면에서는 각각의 나라에 핀란드ㆍ독일ㆍ오스트리아가 ‘대부’ 역할을 학 있어 거의 서유럽 국가나 다름없게 됐다.

 두 번째 그룹에는 폴란드ㆍ라투아니아ㆍ헝가리와 단일 국가는 아니지만 과거의 동독지역이 속한다. 개혁 세력들이 과거 소련으로부터 이탈하는 데 선각자 노릇을 해 서유럽체제 도입을 밀어붙이다시피 서둘렀다는 점이 비슷하다. 그 결과 충격 요법 식의 체제전화, 특히 경제 사유화 과정에 따른 문제점을 대다수 주민이 짊어지고 있다. 이 두 번째 국가군은 사회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빈곤층과 사회정의의 대변자로 나서 쉽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10일, 유권자 7백50만 가운데 70%가 참여한 헝가리 총선에서는 사회당이 90년 총선 때의 3배를 넘는 33% 득표율을 기록하여 기독교 보수세력의 연립정부 민주포럼을 3배의표차로 눌렀다. 구체제 때의 사회주의통일당 후신인 사회당이 다음 연립정부의 주역이 됨으로써 4년 전에 시작한 개혁을 다시 개혁하라는 헝가리 국민의 의지가 관철된 것이다.

 89~90년 전환기에 민주포럼은 개혁사회주의 세력과 최대한의 협상력을 발휘해 과도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합의했다. 그러나 민주포럼 내부에서는 90년초 총선 직후부터 보수우익과 극우민족주의 노선을 분간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팽배해 노동조합이나 야당과의 협상, 권력 분립의 원칙을 무시하고 사회 통제에만 몰두하는 상황이 이어져 왔다. 국내 정치는 국영기업 사유화 문제에 걸려 비틀거렸다. 헝가리 신탁관리청은 대규모 공장을 정비해서 충분한 가격에 파는 대신 먼저 외국 기업에 넘기고 그 다음에야 국내에, 그것도 옛 소유권자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그 결과 대규모 기업에 대한 통제 불능, 생산과 투자 감소가 잇따랐다. 게다가 매각 과정이 불투명해 족벌 등용과 부패에 대한 의혹이 쌓였다. 지난 4년 간의 사회 안정은 보수우익의 정경유착과 국민총생산 저하, 무역 역조, 국가 채무 누적 앞에 무기력해진 시민들의 침묵이었음이 이번 총선 결과 드러난 셈이다.

 세 번째 그룹은, 탈사회주의라고 할 만한 정치 변혁이 아예 없었던 지역이다. 여기에는 소련 해체 이후의 후속 국가들과 발틱 지역의 민족 국가들이 속한다. 부카레스트ㆍ모스크바ㆍ키예프ㆍ바쿠ㆍ민스크에서는 어느 정도 정치 노선을 바꾼 과거의 당 간부들과 옛 특권층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인권운동이나 노동조합이 아니라 당중앙위원회나 정치사무국에서 정치 기술을 익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우크라이나의 권력층, 그리고 과거 모스크바시다 책임자였던 옐친도 여기에 속한다. 루마니아의 경우 89년 12월의 민중봉기와 차우셰스쿠 처형이 있었지만 이것이 곧 정치 변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12월 사태’는 소련 비밀경찰이 모스크바에서 쓴 각본에 따라 루마니아 국가안전부가 연출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루마니아 주간지《22》에 따르면 소피아에서 최근 공개된 기록 영화에 당시 루마니아 국가안전부 장교가 군중 시위에 앞장서서 ‘차우셰스쿠 타도, 공산주의 타도!’를 확성기로 외치고 시위 방향을 지시하는 장면이 잡혀 있다. 이 세 번째 그룹에 ‘1989년의 혁명’은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구체제와 신체제 간에 분명한 분리ㆍ단절이 있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리가 인다.

구체제 청산과 체제 전화 사이의 고뇌
 네 번째 그룹에는 불가리아ㆍ슬로바키아ㆍ알바니아가 속한다. 경제 개혁이 중도에 멈춘 곳이다. 불가리아에서는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개혁 입법을 연기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사법부와 대중언론 분야에 옛 당간부들을 앉히는 조처가 관철되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경제 위기와 선동적인 민족주의에 발목이 붙잡혀 있어 92년의 선거에서 14%를 얻은 ‘민주좌익’이 다음 정부에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알바니아에서는 구체제가 동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하게 정리되었다. 과거의 당수ㆍ총리ㆍ장관, 정치국 사무국원 대다수가 재판에 회부돼 징역형을 받았다. 그렇지만 수십년에 걸친 고립과 발칸 분쟁, 빈곤의 유산에 짓눌려 개혁에 대한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원인으로는 먼저 동유럽 주민들의 좌절감을 들 수 있다. 구체제 해체후 곧 서유럽의 소비 문화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환상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동서 냉전기에 이 환상을 불어넣은 서유럽은 철의 장막이 걷힌 순간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유 삼아 동유럽 상품과 노동력의 진출에 문을 닫아 걸었다. 그 대신 동유럽에 요구한 것은 시장경제로 이행할것과 경쟁력 확보, 이를 위한 내핍뿐이었다.

 둘째는 동유럽의 구체제 타파에 기여한 초기 시민운동 세력들이 공동의 적이 사라진 순간부터 분열의 길을 밟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리투아니아ㆍ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ㆍ불가리아ㆍ동독에서 드러난 분열 과정이다.

 엄밀히 따져 동유럽에 사회주의가 복귀하는 현상은 두번째 그룹에 한정된 것으로, 과거 체제 내에서 사장되었던 개혁 사회주의 노선의 복귀이다. 헝가리 사민당, 독일 민사당이 대변하는 개혁 사회주의노선은 구체제 청산과 체제 전환이라는 두 과제에 직면한 동유럽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프랑크푸르트ㆍ허 광(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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