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열두 차례 만난 金瑞明씨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07.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경의 동방경제기술개발공사는 중국이 북한과 교역.교류하는 창구이다. 지난 30년간 중.북한 교류의 책임을 맡아온 이사장 金瑞明씨(61)는 80년대 중반부터는 직접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김정일 등 북한 지도층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중.북한 교류문제, 북한 핵 문제, 남북문제 등에 관해 논의해 왔다. 김서명씨는 현재 중화전국공상업연합회 상무위원, 중국 조선족총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는데 한국의 대륙연구소 고문과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자문위원을 맡아서, 북한 지도층의 생각을 한국에 알리는 일도 해왔다. 북경의 김서명씨와 전화 및 전문을 통해 대담하여 김정일의 여려 면모와 그의 정책에 관해 알아 보았다.

김회장께서는 언제부터 무슨 일로 북한 지도자들을 만나셨습니까?

 저는 중국과 북한 사이의 교역.교류를 책임지고 있는 중국 중앙정부의 관리로서, 87년부터 북한에 왕래하면서 김일성.김정일등 지도층과 폭넓게 만나서 북한의 유엔 가입, 개방 개혁, 남북회담과 남북교류, 핵사찰, 이산가족 찾기 같은 문제에 관해 논의하면서 북한 지도층의 견해를 들었습니다. 저는 김정일을 열두 번 만났습니다. 김정일은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중국이 어떻게 사회와 경제를 개방했으며 그 추이는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후 북한은 여섯 분야의 특별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해 개방에 따른 문제들을 현지에서 조사해 갔습니다. 이 특별대표단은 세 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갔습니다. 김정일이 개혁.개방에 정책 비중을 두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김정일 개인의 풍모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그는 언제나 노동복이나 점퍼 차림이었고, 정장을 한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상대방에게 반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상대에게 반대 의견을 내놓을 때나 상대의 의견을 물리칠 때,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그의 말투는 매우 빠르고, 높고, 단호합니다. 그의 말투는 분명히 충동적이고 격정적입니다. 그러나 그가 일을 처리하는 결과를 보고, 그의 풍모나 말투와는 달리 합리성을 갖춘 인물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최근 김정일을 만난 것은 언제였으며, 그때 무슨 말이 오고갔습니까?

 지난해 8월에 만난 핵사찰과 북한 경제에 관해 논의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때 논의된 사항들을 한국 정부 고위층에 전달했다는 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김정일이 한국 정부에 보낸 전언의 내용은 김일성 주석이 카터 전 미국 대통령 편에 한국에 보낸 전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특별한 친분이나 인맥이 있으십니까?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려면 특수한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선친은 광(光)자 식(植)자 쓰시는 어른인데, 청년 시절에 김일성주석과 용정에서 함께 항일활동을 하셨습니다. 60년대부터 북한대표단이 중국에 오면 그들을 접대하고 안내하는 일을 제가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는 김일성.김정일.박성철.김일 등 북한 지도층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을 수가 있었습니다.

김회장께서는 북한을 자주 방문하고 또 김정일을 거듭 만나는 과정에서 그의 지도력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87년 처음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저는 김정일이라는 인물과 그의 지도력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들을 너무나 많이 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선 개인 숭배라는 ‘미신’을 증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인물이 후계자로 떠오르는 북한 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주 북한을 왕래하면서, 그에 대한 저의 인식은 바뀌었습니다. 그의 지도력의 강점은 철저한 ‘현장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북한의 여러 지방을 두루 다녀보았는데, 김정일이 직접 방문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김정일은 전국 각지의 공장.농장.군부대.문화단체를 모두 찾아가 조사하고 실태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현장에서 어떤 곤란한 점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도 북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며, 또 현실적으로 김정일 이외에 다른 지도자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또 70년대 초부터 당의 핵심 조직을 장악해 왔기 때문에 주변에 수많은 충성스런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부터 완전한 김정일 시대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질 체제가 아닙니다. 이런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정일의 성품이 그의 지도력에 치명적인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관측이 무성한데,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저는 30년간 중국의 대외 경제와 교류 문제에 종사해 오면서 그런 보도나 관측을 수없이 접했습니다. 사람들은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실의 실체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일에게는 부덕함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는 개성이 강해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남의 의견을 참고로 삼기를 싫어하며, 국제 사회에 대한 경험이 태부족해서 세계의 현재 모습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경제를 운영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북한의 경제가 난국으로 빠진 데 대해 일정한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최근에 와서는 개혁.개방을 조심스레 추진하면서 경공업.무역 분야를 확장하는 일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그가 미래의 북한 사회를 이끌어 가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김회장이 보신 북한의 경제난은 어느 정도입니까?

 김일성 주석이 평생 강조해온 ‘기와집에 이밥, 소고기국’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와집이나 소고기국이 문제가 아니라 이밥(쌀밥)이 문제입니다. 주거와 의복은 기초적인 것이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은 큰 고통입니다. 북한은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은 지금 건국 이래 최악의 경제난에 빠져 있습니다.

김회장은 김정일과 북한의 개혁.개방 문제를 논의하셨다는데, 북한이 과연 개방으로 나서리라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등소평의 개혁.개방 노선을 지지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정책으로 12억 인구의 ‘먹을 것’을 해결해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북한도 하루속히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다른 경제 분야를 발전시킬 수가 있을 것이고, 김정일도 그같은 사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50년 간의 정권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북한은 80년대 말부터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려 했고, 그런 조짐은 확실히 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제.국내 정치상의 여러 가지 난제로 인해 개혁.개방 정책에 속도가 붙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이제 김정일 시대를 맞아 개혁.개방을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추진해 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북한이 미국과의 회담에 걸고 있는 기대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김회장은 북한의 핵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십니까?

 제가 중국에서 이해하기로는, 김일성 주석이 카터씨와 만난 자리에서 사실상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약속했다고 봅니다.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게 될 것이고, 한반도 비핵화나 남북문제도 이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것이며, 김정일 역시 김일성 주석이 설정한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김정일이 남북 경제협력 방안이나 통일 방안에 대해서 남쪽에 전해달라고 한 전언이 있습니까?

 김정일의 방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번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때 저는 중국의 조선족 대표로서 한국을 방문했고, 그 무렵 한국 지도층을 만났습니다. 그렇게만 말하겠습니다.

이번 김일성 주석 장례식 때 평양에 다녀오실 계획입니까?

 15일 평양으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할 계획입니다. 북경에 돌아와서 《시사저널》에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