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장고 끝에 패착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06.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승용차 진출 일단 좌절… “너무 쟀다” 자성론 속 “아직 기회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삼성그룹의 승용차 시장 진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상공자원부와, 시장에 어떻게든 진입하려는 삼성그룹의 신경전은 현재 소강 상태다.

 상공부는 삼성그룹의 승용차 시장 진입 불가 입장을 공식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상공부 내에서는 한때 김철수 상공부장관이 출국한 5월14일 직전을 이를 발표할 디 데이로 검토한 적이 있다. 기세를 누그러뜨리기는 삼성그룹도 마찬가지다. 삼성은 상공부의 입장을 어느 정도 확인하고 나서 기술 도입 신고서를 제출하려된 계획을 유보했다. 그보다는 더 나은 시기를 노리거나, 승용차 시장에 우회해 들어가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

 불확실한 전쟁 결과에 대한 전망보다는 개전 초기 한풀 꺽인 측의 자성론이 더욱 흥미롭다. 삼성 내부에서는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승용차 시장 진입이 왜 이렇게 어려워진 것일까를 스스로 되새겨 보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삼성 계열사 내부에서 패착 1호로 꼽는 것은 자신들의 지나친 자신감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에 때맞춰 신경영을 추진했던 삼성은, 어느 그룹보다 새 정부와 가까웠거나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룹 안팎에서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김영삼 정부가 삼성의 숙원 사업에 제동을 걸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사태를 낙관했다는 것이다.

상공부 관료들 ‘반삼성 기류’ 강해
 정작 문제는 승용차 시장 진입에 대한 실무 권한을 가진 상공부에서 불거졌다. 상공부 관료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과 접촉했던 삼성의 한 실무자는 “상공부 관료들이 삼성에 대해 그렇게까지 반감을 지닌 줄은 몰랐다” 라고 자인했다. 실제로 삼성이 승용차 시장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언론과 정부에 가장 강력하게 피력한 이들도 상공부 실무자들이다. 앞장서서 다른 경제 부처 장관과 기자단에 부정적 견해의 일단을 흘렸다.

 두 번째 패착 역시 이런 관점의 연속선상에 있다. 삼성과 정부와의 좋은 관계가 오히려 승용차 사업 진출에 걸림돌이 됐을 수도 있다는 견해다. 결국 상공부 실무자들의 반삼성기류가 삼성그룹의 홍보 전략 실수에서 비롯했다는 자성론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그룹 내부의 한 보고서는 자사의 홍보 전략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현정권 출범후 삼성의 신경영을 홍보해 국민에게 삼성의 이미지를 높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민자당 연수원 교육 등으로 현정권과의 관계가 과대 포장된 느낌을 주었다.’ 여기서 과대 포장됐다는 것은 현정권과 실제보다 더 친밀하게 비쳤다는 것을 뜻한다. 말을 바꾸면, 실속 없이 겉치레만 요란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자성론이다. 실제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 삼성은 새로운 사업이나 기업을 확보하는 데서 다른 그룹에 비해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롯데월드 부지를 되돌려받은 롯데그룹과, 데이콤을 사실상 인수한 럭키금성그룹, 한국이동통신을 장악한 선경그룹이 실속을 챙긴 것에 비해 대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경유착의 ‘주범’으로 몰린 것은 그동안의 홍보 전략에 문제가 있지 않았으냐 하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고위층이 상공부의 강경한 반대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현정부와 삼성과의 관계에 대한 세간의 여론 때문이었다는 것이 삼성 내부의 시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삼성에게 승용차 사업을 허가할 경우 재벌에 대한 특혜 시비를 불러일으켜 앞으로의 정국 운영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들은 승용차 시장 진입을 추진하면서 이런 경제 외적인 변수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을 뼈아프게 되씹고 있다.

 그렇다고 삼성과 정부의 밀월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한 부장은 애당초 밀월 관계는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고 말하면서도 “앞으로 정권과는 가까이도, 멀리도 하지 말라는 선대 회장의 충고를 더욱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겠느냐”라고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이런 전망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삼성이 위세보다는 실속을 더욱 중시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5월26일 입찰이 시작되는 한국비료를 비롯해 일부 공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실리를 챙김으로써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부산 지역 여론이 한가닥 희망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앞으로 경제 외적인 요인, 특히 정국의 흐름이 승용차 사업 추진에 불리해질지도 모른다고 내다본다. 정부가 삼성이 승용차 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해 곧 열릴 정기국회나 내년의 지자제 단체장 선거에서 쟁점으로 떠오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삼성그룹 일각에서는 부산 지역 여론에 한가닥 희망을 건다. 5월3일에는 부산상공회의소 대표들이 김철수 상공부장관을 면담했고, 삼성 승용차 공장 유치를 바라는 부산지역 경제인들이 연대서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마침내 5월14일에는 정재석 부총리가 부산을 방문해 부산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삼성의 승용차 사업 진출을 허가해 달라는 부산 상공인들의 요청을 경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이 현정부와 가깝다는 여론이 오히려 굴레가 되었듯 부산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이라는 것이 오히려 사업 추진에 악재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

 삼성이 때를 놓쳤다고 통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특히 삼성측은 현정부가 들어선 뒤 승용차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두 번 정도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첫 번째가 삼성 계열사인 삼성생명이 기아자동차의 주식을 매집해 물의를 빚던 지난해 하반기.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라도 문제가 공론화했을 때 승용차 시장 진입 문제를 매듭지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당시 그룹 내부에서 어느 정도 강하게 제기됐는지 확실치 않으나, 기아자동차에 대한 ‘적대적 인수’방안을 검토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번의 기회는, 김영삼 대통령의 정국 주도권에 큰 흔들림이 없던 지난해 말, 그때 속전속결 방식으로 기술 도입 신고서를 제출했더라도 삼성에 대한 특혜 의혹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 전에는 기술 합작선이 결정되지 않아 기존 업체를 인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연말께에는 합작 대상자가 좁혀져 조금 더 밀어붙였다면 기술 도입 신고서를 제출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삼성은 왜 호기를 놓치는 우를 범했을까. “앞뒤 너무 잰 것이 사실이다. 그룹의 숙원 사업이니만큼 모든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도 든다.” 아직도 상황을 비관하지 않는다는 삼성중공업 한 임원의 자아 비판이다. 결국 삼성 특유의 신중함이 초기 패인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지적인 셈이다.
金芳熙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