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이방인’ 되살아오다
  • 파리 ·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4.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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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자전적 유고 《최초의 인간》 서점가 강타 · · · ‘신념의 삶’ 잔잔한 교훈

지난 4월 중순 출판되어 프랑스 문화계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었던 알베르 카뮈의 유고 《최초의 인간》 열기가 두 달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 서점판매가 시작된 지 1주일 만에 5만부 이상이 팔려 급히 재판 인쇄에 들어갔는가 하면, 발행사인 갈리마르 출판사와 번역 계약을 마친 외국 출판사도 한국의 ‘도서출판 열린책들’을 포함해 열여섯 군데나 된다. 《최초의 인간》을 내기 위해 3년 동안 동분서주한 카뮈의 딸 카트린느 카뮈는 “이처럼 열광적인 반응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다.

 예상 밖이라고 하지만, 판매 부수로 치자며 이전에 나온 카뮈의 작품들은 갈리마르 출판사의 발행 도서 목록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책’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굳힌 지 오래다. 카뮈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방인》은 42년 초판을 낸 뒤로 50여년 동안 프랑스 국내에서만도 7백만부가 팔렸으며, 《페스트》《전락》은 각각 5백50만부와 백만부 이상씩 팔렸다. 특히 《이방인》의 경우 해마다 20여만이 넘는 프랑스 젊은이들이 이 작품을 ‘발견’ 또는 ‘재발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또한 이 작품들은 이미 40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유품 속에서 찾은 미완성 소설

 《최초의 인간》이 이같은 성공을 거둔 이유는 무엇이며, 이 성공이 카뮈 측근들에게 예기치 않았던 기쁨을 자아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최초의 인간》은 60년 1월4일 카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그가 지니고 있던 가방에서 찾아낸 미완성 소설이다.

 때로는 마침표나 쉼표조차도 찍지 않고 숨가쁘게 펜 가는 대로 깨알같이 써내려간 1백44쪽짜리 초고가 카뮈 사후 34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이 미완성 작품이 《안과 겉》을 제외한 카뮈의 다른 작품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자전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독자들을 열광케 하는 요소다.

 소설은 1913년 어느 가을밤 서른살 가량된 프랑스 남자가 만삭인 스페인 출신 부인과 네 살짜리 아들을 마차에 태우고 알제리의 솔페리노라는 마을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집에 도착할 무렵 부인은 진통을 시작하고, 남편이 의사를 부르러 간 사이 이웃집 여인의 도움으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자크코르메리, 그는 알베르 카뮈 자신이다.

 프랑스 본토 태생으로 일자리를 찾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이주한 그의 부친은 이듬해 1차대전 발발과 더불어 징병되어 마른느전투에서 사망한다. 자크 코르메리는, 귀머거리이며 말이라곤 거의 없는 모친과 억척스럽고 폭군 같은 외할머니 등 아무도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가난하고 무지한 식구들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태양의 열기와 강렬한 빛, 바다, 삶에 대한 절망적인 갈망 등 카뮈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주요 테마가 곳곳에 흘러넘치고 있는 《최초의 인간》에서 독자들은 정제되기 이전의 카뮈의 적나라한 감수성과 만나는흥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완전한 소설로 가공되기 이전 상태의 원고를 훔쳐 보는 데서 오는 은밀한 희열감이랄까. 《이방인》에 담긴, 지극히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를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최초의 인간》의 카뮈는 한결 친근한 모습으로 접근한다.

 카뮈가, 자신이 한살도 채 되지 않았을 대 전쟁터에서 포탄 파편을 맞고 사망한 아버지의 묘소를 처음으로 찾은 것은 47년, 즉 그가 서른네살 되던 해였다. 묘비에서 그는 사망당시 아버지(29세)보다 자기가 더 연장자임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한다.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이같은 무질서, 혼돈과의 대면이 《최초의 인간》을 구상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성인이 된 자크 코르메리가 아버지의 자취를 더듬어가는 과정이 소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난한 자들의 기억이란 우선 부자들의 기억만큼 풍부하지 못하며’, 가슴에 아로새겨진 기억이 가장 확실하게 믿을 만하고들 하지만 ‘그 가슴마저도 고난과 노동으로 지친 나머지 피곤의 무게에 견디지 못해 쉽사리 잊혀지게 마련’인 탓에 결국 그는 아버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거의 얻지 못한다. ‘잃어버린 시간은 부자들에게서나 찾아지는 법’이라고 카뮈는 덧붙인다.

 원래 유년기 · 청장년기(정치적 입장, 알제리 문제, 레지스탕스) · 어머니(아랍 문제, 식민지 문제, 서구의 운명)의 3부작으로 구상되었던 이 작품은, 카뮈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제1부인 유년기에서 막을 내리고 만다. 침묵할 줄밖에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역사의 망각으로부터 끄집어내려는 시도인 《최초의 인간》은 카뮈식 휴머니즘의 소설적 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카뮈 붐, 모럴리스트에 대한 갈망의 반증

 카뮈는 살아 생전 사랑과 마음을 동시에 받았던 많지 않은 문필가 중의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애증이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게 된 데에는 그가 작가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였다는 사실이 무관하지 않다. 작가로서의 카뮈가 죽은지 30년이 지나도록 대중으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자 카뮈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평가는 반드시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용 철학자’라는 조소적 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프랑스 지성계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부조리의 철학자’ 카뮈는 고립된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식민지 알제리 태생에다 빈곤한 문맹 가정 출신이라는 것도 카뮈와 파리 출신 부르주아 좌익 지식인들 간의 이질감을 크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도그마적인 모든 체제에 반발하고 자기가 직접 겪으면서 깨달은 진실만을 토대로 사고하는 카뮈가, 개념을 체계화하고 그렇게 체계화한 이론의 진보를 절대적인 가치로 삼는 사르트르같은 철학자들과 연대으식을 나누기 어려웠으리라는 점은 쉽게 수긍할 만하다. 한때 실존주의에 동조했던 이 두 철학자의 불화는 51년 카뮈의 《반항인》출판을 계기로 공식화했다. 이 책에서 카뮈는, 역사를 번복할 수 없는 절대권력으로 보고 공산당에 의한 사회주의 사상의 독점을 기정사실화하는 당시 프랑스 진보 지식인계에 반기를 든다.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을 통해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던 당시 지적 풍토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반스탈린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은 스스로 파문을 자초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추상적이고 집단적인 ‘민중’의 개념을 이상화하던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다릴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민중의 삶을 자기 몸으로 실제 살아본 카뮈에게는 역사 이전에 삶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 그에게는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보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훨씬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이론화에 강했던 사르트르가 그 이론을 실행하는데는 일관성이 없고 애매한 태도를 보인 반면, 논리정연한 체계를 세우는 데
에 사르트르보다 뒤졌던 카뮈는 자신의 구체적인 신념대로 사는 데에 훨씬 철저했다. 독일군 치하에서 비밀 간행물인 《콤바》지의 편집장을 지냈고,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사실이 그 대표적인예라 할 수 있다. 비록 혁명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어린애들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한사코 이를 거부하던 《정의의 사람들》의 주인공은 바로 카뮈의 이같은 철학적 · 윤리적 입장을 대변한다. 테러를 불사하고서라도 독립을 쟁추하고자 했던 알제리 혁명주의자들을 파리 지식인들이 지원할 때 카뮈가 “나는 정의도 사랑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나의 어머니도 사랑한다”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자기 어머니 · 친척 · 친구들을 앗아갈 수도 있는 테러 행위를 지지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무책임한 행위라는 그의 입장은, 당시를 지배하던 비관용적 흑백 논리에 가려 빛을 볼 수 없었다.

 《반항인》 논쟁은 표면상 사르트르의 승리로 끝났으나, 카뮈도 사르트르도 사망한 오늘날 역사의 아이러니는 역사의 절대성을 부정한 카뮈식 휴머니즘이 옳았음을 증명해준다.

 보스니아 내전, 알제리 과격 이슬람주의자의 테러, 르완다 종족 분쟁 등으로 인류가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증오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요즈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하는 문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긴박한 과제로 인식된다. 따라서 《최초의 인간》이 불러일으킨 열기는 작품 자체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일 뿐 아니라, 모든 좌표를 상실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를 제시해줄 수 있는 모럴리스트가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파리 ·양영란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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