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언어로 그린 정물화
  • 이세용(영화평론가) ()
  • 승인 1994.08.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

〈그린 파파야 향기〉처럼 적은 대사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영화는 흔치 않다. 영화 만들기가 어려운 베트남의 형편 때문에 프랑스에서 프랑스 기술진의 협력으로 제작한 이 영화는 93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신인 감독상)을 받았고, 금년에는 프랑스 국내 영화제인 세자르영화상 신인 감독상을 받았다. 그러나 감독과 시나리오, 출연 배우들이 모두 베트남 사람이고, 영화속에서 사용된 언어가 베트남어이므로 이 작품은 누가 뭐래도 베트남 영화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1950년대 전쟁중인 베트남. 시골 소녀 무이가 도시 변두리의 한 가정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하여 10년 세월을 보낸다. 소녀는 고참 하녀의 지도로 음식 솜씨를 익히며 주인집 형편을 알게 된다. 안주인이 꾸려가는 살림은 점점 어려워지고, 며느리가 들어오자 소녀는 이웃의 음악가 집에 가정부로 들어간다. 음악가에게는 발랄한 약혼녀가 있지만 무이는 매력적인 태도와 착한 마음으로 남자를 감동시켜 그 집의 안주인이 된다.

 할리우드식 시나리오로 보면 도저히 만들수 없을 정도로 심심한 이야기이다. 그란 이 작품의 담담함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에 의해 침묵의 언어로 살아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트에서 촬영한 이 작품은 여러개의 문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폐쇄된 공간의 ‘닫힌 느낌’을 거뜬하게 해결한다. 정지된 장면과 움직이는 장면(사람 혹은 카메라)의 절묘한 배합으로 영화의 리듬을 조절하는 솜씨도 탁월하다. 뿐만 아니라 감독은 시종일관 새 소리와 곤충 소리를 전면에 혹은 배면에 깔아서 인간의 삶이 자연 환경 속에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때때로 정물화처럼 느껴지는 이 작품에서 액션이라고 해봐야 소녀 무이가 두번쯤 걸레질하고, 그린 파파야 요리를 만들고, 주인 남자가 악기를 다루는 장면이 눈에 띌 뿐이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 집안의 형편과 베트남의 상황을 너끈하게 짐작할 수 있다. 트란 안홍 감독이 시치미를 떼며 베트남의 dr사와 사람들, 특히 여인들의 끈질긴 삶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말수도 적고 소란스런 몸짓도 억제하지만 주인집 할머니를 연모하는 동네 노인의 유머를 통해〈그린 파파야 향기〉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어쨌든 살며 사랑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생물에 대한 애정과 외경심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명작 필름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