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전쟁에서도 결국 이기는 자는 없다”
  • 정리ㆍ하창섭 기자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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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40주년 국제회의 참석자 대담

 본지는 한국전 당시 유엔군 사령관 고문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맨씨, 소련 전투기 조종사였던 스몰체코프씨, 제네바회담의 소련측 통역을 맡았던 한 마르크스(현 모스크바 청년대학 교수)씨와 유엔정전위 한국측 대표였던 林善河씨를 초빙, 경희대 羅鍾一교수의 사회로 특별 좌담회를 5월29일 오후 가졌다. 이들은‘한국전 발발 40주년 기념 참가자 국제회의’(경희대 인류사회재건 연구원 주최,《시사저널》후원)에 참석했었다.


 라종일 교수: 세미나에 참석한 소감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하우스맨: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이러한 모임의 참석자들이 과연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막상 세미나가 진행되면서 이런 저의 의구심이 말끔히 가셨습니다.

 스몰체코프: 지난 40년간 소련사회에서는 한국전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이번 세미나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부터 소련사회가 크게 변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한국전 참전병사들에 대해서도‘국제 戰士’라느 칭호가 주어졌습니다.

 한 마르크스: 불과 5년전만해도 한국에서 열리는 이런 세미나에 참석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이번 세미나는 한국전 발발원인과 책임자 규명에 있어 참석자간에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라: 한가지 궁금한 점은 6ㆍ25당시 북한이 상당 기간 남침준비를 해왔으리라 보는데 그동안 미국이 과연 몰랐겠느냐, 아니면 알고서도 내버려 두었느냐 하는, 즉 정보부재의 문제인데요. 하우스맨씨는 어떻게 보십니까

 하: 초반에 한국군이 실패한 데는 훈련, 장비, 물자부족 등 제반요인이 있습니다. 잘 훈련된 북한 인민군에 비하면 한국군은 보이 스카웃 격이었죠. 6ㆍ25 발발 당시 한국에는 1백여명의 미군사고문단원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보기엔 북한의 남침 징후가 뚜렷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충분한 정보가 없었다기보다는 정보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실패했다는 데 있었다고 보아야지요.

 라: 정보부재라기 보다는 정보에 대한 정확한 해석력 부족을 지적하셨는데 당시 하우스맨씨는 관련정보를 수집, 이를 국무성에 보고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하: 제가 보고한 게 아니고 정보담당인 G-2에서 했습니다. 당시 로봇 장군은 저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남침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으나 참모들의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의 정보보고에 대해“하우스맨씨, 당신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만 정보는 당신 소관이 아닙니다”하며 저를 물리치곤 했죠. 따라서 정보 해석 실패의 책임은 G-2정보 딤당 요원들이 져야 합니다.

 임선하: 제 견해로는 북한의 남침‘의도’는 일단 그들의 침략 준비 상황이나 침략 가능성을 보고 미루어 파악할 수 있었는데 역시‘의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정치적 영역에 속한 것이라 봅니다.

 라 : 제가 알기로는 한국의 국방부가 여러차례 북한의 남침이, 그것도 가까운 장래에 있을 수도 있음을 경고한 것으로 압니다. 특히 맥아더 장군의 비밀문건을 보면 6ㆍ25 발발 2주전까지만 해도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시되었다고 아는데요.

 하: 제 견해로는 김일성은 남침하고 싶었으나 소련은 한국에서의 전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김일성이 남침을 명령한 상황에서 소련으로서도 제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임: 미군사고문단이 남침 가능성을 왜 미리 파악 못했느냐 하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당시 군사고문단이나 한국군 당국은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은 있으나 과연 남침을 실행에 옮길 것이냐에 대해서는 누구도 판단 못했습니다. 사실 6ㆍ25가 발발하기 직전까지 일선에서는 남북한군 양측간에 무력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했던 터였고 저의 감각으로는 그러한 국경충돌이 일선 지휘관의 판단에 따른 극히 국부적인 것이었지 이를테면 육군 본부의 지시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간은 국경충돌사건에 대해 아군측은 일종의 무감각증에 빠져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군은 중대훈련이나 대대훈련을 받은 경험이 전혀 없었지요. 말하자면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라: 한국전 당시 로버트 장군이“한국에서는 탱크가 필요없다”고 한 말이 꽤나 유행했는데 그 분이 왜 그런 말을 했다고 봅니까?

 하: 로버트 장군 자신이 훈륭한 탱크兵 출신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세계 1ㆍ2차 대전을 통해 유럽식 탱크전략개념에 익숙해 이었는데 이를테면 탱크 50~60대가 나란히 진격해가면 보병들이 뒤를 쫓는 식이죠. 그러나 한국의 지형에서는 탱크 2대가 나란히 가다가는 논이건 밭이건 적기에 발견돼 폭격당하기 일쑤지요. 따라서 한국에서 탱크전을 하기에는 적합지 않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로버트 장군은 한국군에 있어 탱크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지요. 우선은 한국군이 북한의 탱크를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군이 탱크를 보유한다면 사기진작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고 비밀리에 본국 정부에 연락해 1개의 탱크대대를 보내주도록 요청했지요. 그는 자주“우리의 실수가 크다”고 말했는데 이는 제가 판단하건대 북한에 대해 워싱턴 당국이 이를테면  미태평양 방어선에서의 한국제외라든가 미군의 철수 등 말하자면“우리는 더 이상 한국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식의 그릇된 신호를 보낸 사실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라: 김일성의 남침에 대해 일부에서는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다고 하고 또 일부에서는 스탈린이 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진실을 규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련 정부가 이에 대한 비밀문건을 공개하는 것이라 봅니다. 스콜체코프씨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스: 영국이나 미국처럼 일정기간이 지나면 비밀자료를 공개토록 하는 법이 소련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련사회가 민주화되면 이 문제도 해결되리라 봅니다. 제 생각에는 당시 한국전에 대한 소련의 참전 결정은 다른 누구도 아니 스탈린에 의해 내려졌습니다. 당시 저의 부대에서는 한국전선으로 가라는 작전명령서가 낭독되었는데 아마 이문서도 소련정부의 문서보관소에 아직 남아 있으리라 봅니다.

 한: 현재 소련에서는 북한의 남침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밀자료의 공개에 대한 법도 머지 않아 채택되리라 봅니다.

 라: 화제를 가벼운 쪽으로 돌려보죠. 북한 인민군의 전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임: 인민군은 한국군에 비해 장비나 전투 유경험자 등 모든 면에서 우세했습니다. 내가 2사단장으로 있을 때 직접 확인해보니 인민군 10명 중 2명은 전투경험이 있었고 특히 분대장과 부분대장은 실전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 근대 아시아 역사를 보다라도 인민군은 아마도 훈련, 전투력에 있어 최정예군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라:한국전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美ㆍ蘇의 공중전이라 보는데요.

 스: 한국전은 미ㆍ소 양국의 최신예 전투기의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준 셈이지요. 소련은 미그15기를 한국전에 처음 투입했는데 속도나 성능면에서 미공군기보다 뛰어났다고 기억됩니다. 다만 조종사의 경력면에서는 미군이 월등했지요. 미공군기의 조종사를 포로로 잡아 신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조종사의 비행시간을 물어보니 무려 7백여시간이라 하더군요. 이는 고참격인 내가 1백50시간인 것에 비해 상당한 비행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소련 조종사들의 평균비행시간이 고작 20~30시간이었던 것을 봐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숫적으로 미·소 공군기가 비슷하면 미공군기 조종사들이 아마 지휘본부로부터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아서 인지는 몰라도 대부분 우리와의 전투에 소극적이었습니다.

 라: 끝으로 한국전이 자신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실가요.

 임: 역시 전쟁에서 얻은 교훈은‘이기는 자도 지는 자도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물리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지요.

 하: 결과적으로 한국전이 인연이 되어 한국에서 근 31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지난 81년 은퇴한 이후 지금은 아무 하는 일 없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곧 저에 관한 책도 나올 예정입니다.

 스: 그간 수많은 전쟁에 참여해 얻은 교훈은‘전쟁은 그 목적이 어떠하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다면 이번 세미나에서 나온 얘기들을 소련인에게 들려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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