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에 나란히 누운 민족시인과 애국청년
  • 연변·박상기 사회부차장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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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못피운 문학 열정, 尹東柱와 宋夢奎…같은해 같은 집에서 태어나 감옥에서 함께 옥사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 龍井이지만 이곳에 이처럼 자랑스런 민족시인이 묻혀 있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덕분에 尹東柱를 알게 돼 정말 고맙습니다.

 북간도 용정시 근교 공동묘지에 있는 윤동주묘를 동행해준〈연변일보〉具長孫(40)기자는 기자의 손을 덥썩 잡았다. 조선족자치주의 수도 延吉에서 발행되는 우리말 신문〈연변일보〉의 편집부차장인 그는 스스로‘朝鮮族通??이라고 자부할 만큼 만주지방의 교포이민사ㆍ생활ㆍ문화 등에 해박했다. 그러한 그마저 윤동주에 대해서는 깜깜절벽이었다.

 그보다 이틀전 기자는 한 안내인과 함께 한나절 동안 용정시 북쪽의 야산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공동묘지를 헤맸으나 끝내 윤시인의 묘를 찾지 못했었다. 그뒤 우연히 알게 된 具기장게‘한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아끼는 시인의 묘??를 참배하지 못해 몹시 서운하다는 얘기를 하자 그는??함께 찾아보자??며 출근도 안하고 길안내를 자청했다. 그와 함께 연길에서 20 km 떨어진 용정에 다시 갔다. 묘소를 알 만한 사람을 몰색하다가 그는 용정중학교 주임교사인 金承吉(58)씨와 집으로 안내했다.


사회주의 문학관에 평가 못 받은‘순수의지'

 金교사의 도움으로 전날 헤매던 곳과는 전혀 다른 야산에서 시인의 묘를 찾았으며,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용정중학교(6년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그전의 중학교들(은진ㆍ대성ㆍ동홍ㆍ명신ㆍ광명)이 하나로 통폐합된 학교였다. 그러므로 1932년 은진중학에 입학한 뒤 이리저리 전학했다가 1938년 2월에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도 이제는 용정중학교 출신이된 것이다. 그래서 용정중학교에는‘윤동주 문학사상 연구소조??라는 학생서클이 생겼고??조선어문??담당교사가 지도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용정중학교 출신 재미교포들의 지원으로 지난해 12월30일(윤동주의 생일)에??윤동주장학금위원회??가 발족했으며, 정년퇴임한 전 용정중학교장 柳記天(60)씨가 위원회장을, 김교사가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지금까지 연변문학사에서 실종되어왔던??윤동주문학??이 조금씩 빛을 보기시작하고 그의 생애에 관해서도 이제야 그의 모교에서나마 알려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그동안 연변문학에서 철저히 소외당해온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시들이‘문화의 사회적 복무??를 작품평가의 척도로 삼아온 사회주의 문학관에 걸맞지 않은 데다 독실한 기독교 가문이며 상당한 재산가의 아들이란 출신성분까지 겹쳐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싶다.??인간존재에 대한 구도자적인 응시와 자아완성을 향한 순수 의지??를 담은 윤동주의 시는 중국사회의??개방??정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리라는 느낌이다.

 윤동주의 묘소를 둘러보다가 뜻밖에 윤시인의 묘에서 좌측으로 봉분 3개만큼 떨어져 있는  ‘靑年文士 宋夢奎之墓??를 발견하였다. 황토를 쌓아올려 만든 봉분은 아직 풀 한포기 돋아 있지 않았다. 청명절인 지난 4월5일, 윤동주위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윤동주는 잘 알아도 송몽규는 모른다. 학자들도“윤동주가 고종사촌인 그와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함께 옥사한 것??이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송몽규는 문학적인 재능이나 청년열사적 기질에서 결코 윤동주에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내성적이고 비활동적인 윤동주를 문학적으로 고무하고 항일의식을 고취시킨 인물이다.

 송몽규는 1917년 9월28일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의 윤동주 집에서 윤동주보다 석달 먼저 태어났다. 송몽규 어머니 윤신영은 바로 윤동주의 큰고모였다. 아명은‘韓範??이었는데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이 이름을 쓰다가 집안 항렬인??奎??자를 붙여??몽규??로 개명하였다. 아버지 宋昌義는 북간도 이민의 첫땅인 명동촌의 명동학교 조선어교사였으며 민족의식이 대단히 강했다고 한다.

 한범소년은 윤종주와 함께 명동소학교를 다녔다.“한범인 머리좋고 공부를 잘할 뿐 아니라, 성격이 활발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라서 무슨 일이든지 한범이가??이런 일을 하자??나서길 잘했고, 그러면 우리는 그대로 따랐었다.??그와 소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생 김정우씨는 작가 송우혜씨가 쓴《윤동주평전》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송몽규는〈동아일보〉신춘문예에 콩트가 당선돼‘文士??의 칭호를 얻은 1935년 4월에 학교를 그만두고 당시 만주국치하에 있던 북간도에서 중국으로 잠행한다. 송몽규에 대한 일본  高경찰의〈취조문서〉에는??(송몽규는) 당시 남경에 잠복하고 조선독립운동 단체인 金九일파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교육받은 곳은 장개석 국민당정부의 중국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漢人교육반??이었다. 1936년 4월 산동성 제남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된 그는 본적지인 함경도 웅기로 압송당한다. 웅기경찰서에서 풀려난 그는 1937년 4월 용정대성중학교(4년제) 4학년에 편입, 다시 용정으로 이사한 윤동주의 집에서 기거한다.

독립운동 죄목으로 함께 체포돼

 1938년 초봄, 윤동주와 송몽규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응시하여 둘 다 합격한다. 윤동주는 1941년 연전 졸업기념 시집으로《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立敎大學으로 유학간다. 다음해 교토 同志社大學 영문과로 편입했으나, 1943년 7월14일 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 다니던 송몽규와 함께 체포되어 독립운동을 한 죄목으로 2년형씩을 선고받는다.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16일 후쿠오타형무소에서 윤동주가 먼저 죽고 그뒤 채 한달이 안된 3월10일 송몽규도 옥사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기도한 윤동주나 낙양군관학교 출신의 열혈청년 송몽규는 일제의??요시찰인??으로서 문학의 재능도, 애국의 정열도 피워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같은해, 한집에서 태어나 시대를 함께 앓다가 한 감옥에서 죽어 이국의 공동묘지에 함께 묻혀 있는 두 청년의 한과 우정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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