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 남도에서 열매맺은 ‘牧者 밀알’
  • 제주 · 박상기 차장 ()
  • 승인 1990.07.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도 이시돌목장 맥그린치 신부의 ‘개척인생’36년

이시돌목장은 제주도의 명물이다. 제주섬의 축산업을 살피거나 한라산 밑 중 산간 지역의 개척사를 말할 때 이시돌 목장은 맨 처음 등장하는 곳이다. 그래서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라는 행정지명보다 ‘이시돌목장’이 더 알려져 있어 제주를 찾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머물곤 한다. 스페인의 농부 ‘이시돌’(1110~1170)은 하느님과 땅을 지극히 섬겨 성자의 반열에 오른 가톨릭 ‘농민의 主保’이다. 흔히 ‘이시돌목장’으로 불리지만 이곳은 양 젓소 말 등을 키우는 목축만을 하는 데가 아니다. 우유가공공장 사료공장 手織공장 등이 있고, 복지시설로 양로원 유치원 유아원과 이시돌의원이 있는 상당한 규모의 가톨릭 공동체마을에 해당된다.

 이시돌마을의 설립자이자 촌장격인 맥그린치 신부(62)는 아일랜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서 1954년에 제주도에 왔다. 골롬반외방선교회는 복음화되지 않은 지구의 오지에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선교기관인데, 뉴질랜드 대만 파키스탄 피지 필리핀 한국 등 20개국에 퍼져 있다.

 “우리들은 지구의 어느 곳이든 자신이 파견된 지역에서 주민들을 만나 그리스도 안에 맞아들이고 그곳의 희망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삽니다. 스물여섯살에 제주도에 첫발을 디딘후 벌써 36년이 지났으니 나도 절반 이상 제주사람이 되었지요. 처음 한국에 올 때,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떠나 뉴욕 · 샌프란시스코 · 요코하마 · 부산까지 18일이 걸렸어요. 지금은 비행기로 18시간이면  닿는 지구촌의 한 식구이지만 그때는 한국이란 나라가 너무나 멀고 낯선 땅이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전쟁 뉴스만 들어서 한국에 가면 한두달 내에 죽을 줄 알았지요.”

 북제주군 한림면에 파견된 그는 민가의 방 한칸을 빌어 주민들을 만나며 그들의 사정을 알아보았다. 주민들은 그를 ‘돈 많은 미국인’으로 알고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했지만 그는 별다른 힘이 없었다. 다만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 병원 문턱에도 못가보고 죽는 환자들, 계가 깨져서 가산을 날리고 자살하는 이들의 가난과 무지 속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맨먼저 주민들의 高利債의 사슬에서 벗어나는게 시급한 과제라 여기고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펼쳤다. 한푼이라도 아껴 저축하는 습성을 몸에 배게 하고, 꼭 필요한 목돈은 저렴한 이자로 쉽게 빌어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8 · 15, 4 · 3, 6 · 25의 대혼란을 거치면서 전통사회의 경계규범이 파괴되고 시중은행의 관제금융마저 뿌리내리지 못한 때라 맥신부의 信協운동은 발전을 거듭하여 제주도 일원에 26개 단위신협으로 확산되어갔다. 그가 주목한 다른 한 가지 구빈사업은 양돈과 목축이었다. 한라산 중턱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초지로 가꾼다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제주에 와서 처음 배운 말이 ‘안됩니다’입니다. ‘신협을 조직하자, 양돈을 해보자, 양을 길러보자’고 권유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안된다’는 겁니다. 왜정 때 일본사람들도 실패한 일이라며 될 턱이 없다고 고개를 돌리더군요.”

 결국 그는 어른들 대신 마을의 청소년들에게 매달렸다. 4H클럽을 조직하고 개량종 어미 돼지 한 마리를 구입하여 새끼를 낸 다음 4H청소년들에게 1마리씩 나눠주었다. 그 돼지를 잘 길러서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 2마리로 갚는 ‘가축은행’식의 조건을 붙였다. 그러나 ‘돼지사업’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부모가 돼지를 팔아 빚을 갚거나 관혼상제용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면양 기르기를 시도했다. 아일랜드에 있는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 후원을 부탁했다. 수의사인 그의 아버지는 이국의 벽지에서 고생하는 아들에게 면양 35마리를 보내왔다. 이 면양이 오늘날 1천5백마리의 양떼와 8백여두의 젓소, 15필의 말이 자라는 2백 50만평의 ‘이시돌목장’을 일구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양털을 깍아 실을 만들어 양말을 짰지요. 그러나 실뽑는 기술이 없으니 양말에 뭉치가 생겨 품질이 엉망이었어요. 주고객은 전국 성당의 신부님들이었는데 우리 양말을 신으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고 놀리곤 했습니다.”

 

면양 35마리에서 2백50만평의 대목장으로

 그후 아일랜드에서 실만들기 베짜기 등에 능숙한 수녀들이 파견나와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62년에 한림수직회사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고급 수제 순모제품을 만들고 있다.  40여명의 종업원이 베틀에 앉아 옷감 담요 등의 순모직물을 짜는 한림수직은 이밖에도 쉐타 털모자 장갑 조끼 목도리 등의 편물제품도 수탁방식으로 생산한다. “편물제품은 우리가 실을 공급하면 부인들이 틈나는 대로 자기 집에서 뜨개질하여 납품하도록 합니다. 가내부업으로 편물 일거리를 가져가는 집이 1천2백세대가 넘었으나 요즘은 많이 줄었어요. 갈수록 수제품의 인기가 높아가지만 일손이 모자라 물건이 달립니다.”

 한림수직 朴敏浩공장장의 말대로 1백% 양모의 수제품들은 서울 조선호텔 · 제주 KAL호텔 ·한림읍의 직매장과 5개 위탁판매장에서만 판매하고 있는데 그 물량이 달린다고 한다.

 맥 신부는 이시돌목장의 살림이 커지자 63년 ‘이시돌협회’를 조직하여 마을 주민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한라산 중간산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넓은 목초지를 조성하고 본격적으로 낙농 양돈 牧羊의 기틀을 다져나간 것이다. 제주도는 토질이 산성이라 사료로 적합지 않은 잡초들이 무성하였다. 이를 중화시키려면 농업용 석회를 대량으로 뿌려줘야 하는데 당시에는 석회를 구경하기조차 어려웠다. 궁리끝에 맥 신부는 바닷가에 흔한 조개껍질을 모아 갈아서 그 가루를 뿌림으로써 토질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72년일 겁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인데, 갑자기 朴正熙대통령이 지프를 타고 여길 찾아왔어요. ‘우리 산에서는 목축이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이시돌목장은 어떻게 성공했냐’고 묻더군요.” 맥 신부로부터 이시돌마을의 자초지종을 듣고간 박대통령은 그후 이곳에 전기 · 전화를 가설해주고, 한림읍에서 목장까지 도로를 포장해 주는 등 상당한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맥 신부는 이시돌 실습목장과 연수원을 세우고 목축기술, 트랙터 운전 및 정비기술, 비료사용법, 목초재배기술 등을 가르쳐 2백30세대의 모범농가를 길러냈다. 이중 1백세대에는 3만평씩의 땅을, 나머지는 1백30세대에는 주택 · 축사 건축비 및 가축 구입비를 13년거치 10년 분할상환 · 연리 3.5%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융자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낙농 선진국인 뉴질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낙농 및 목초재배 기술자들을 데려와 목축에 뜻을 둔 농촌청년들을 교육시켰다.

 오늘날 제주 중산간지방에 산재한 크고작은 목장 중 상당수가 이곳에서 훈련받은 교육생들이 터를 닦은 곳들이다. 그는 또 이시돌목장 직조공장 사료공장 우유공장 등을 운영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양로원 의원 유아원 등을 설립하여 사회복지사업을 펼쳐왔다. 특히 무의탁노인 57명을 돌보는 양로원과 영세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이시돌의원은 제주도 일원에서 이름난 복지기관에 속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목장 관련 사업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져 이시돌 마을뿐 아니라 ‘목축 제주’의 앞길이 불투명하다. 게다가 호텔 · 대규모 관광단지 등 현지인들을 소외시킨 채 추진되는 기업형 관광개발에 밀려 땅을 팔고 고향에서 뿌리 뽑힌 주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도는 자연풍경이나 인심이 내 고향인 아일랜드 서부의 돈니골 지방과 너무 흡사하죠. 아일랜드에서는 자연부락을 그대로 살려서 관광객을 맞이합니다. 외국관광객들이 농촌에 들어와 민박을 하도록 하고, 마을사람과 함께 밥먹고 목장일도 거들면서 그곳의 정취를 맛보게 하지요. 호텔에서 잠자고 위락시설과 관광단지에서 사진 몇장 찍는 여행은 사실 수박 겉핥기 여행에 불과합니다.”

 맥 신부의 친누이도 아일랜드 고향에서 민박농가를 차리고 있다고 한다.‘관광 제주’의 꿈은 아일랜드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한다고 역설하는 맥그린치 신부. 그렇게 되려면 “현지인이 제 땅에서 주인 노릇할 수 있게 地自制가 실현되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반문하는 노신부의 눈에는 ‘順命의 땅’으로 받아들인 제주섬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