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 벌판에 선 시련의 대학
  • 경남 진주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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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전남대.경상대 이념 진통 현장

고려대 서울경찰청이 지난 8월4일 고려대생들로 이루어진 ‘김일성주의 청년동맹(김청동)’ 조직원 검거를 발표하면서부터 고려대는 심한 내부 진통을 겪고 있다. 경찰은 이 조직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해 왔으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구속된 10명은 전원 고려대 졸업생이거나 재학생이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한국민족민주전선 산하 조직인 김청동은 학생조직 담당, 노동조직 담당, 문건제작 담당 등으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전국 규모의 조직을 건설하려 시도해 왔고, 한총련.서울대.고려대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조직의 고려대 지부가 김정일의 생일을 따서 만든 ‘2.16청년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수사 발표에 대해 학생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 사건이 공안정국을 틈타 학생운동을 뿌리 뽑으려는 당국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우선 조직원으로 발표된 사람들이 대부분 높은 학번들로, 학생운동을 정리한 상태에서 대학원에 다니거나 취업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든다. 고려대 총학생회는 이 사건에 대한 성명서에서 ‘활동하지 않는 자가 무슨 음모를 꾸미며, 그것이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이번 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모임이 복학생협의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도 그같은 이유 때문이다. 총학생회의 한 간부는 “학교 내에 다양한 내용을 공부하는 학습 소모임이 여럿이며, 이번 조직도 기껏해야 그 정도였을 것이다. 한총련 배후 조종이란 어불성설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고려대가 관련된 조직 사건은 예견됐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오래전부터 당국이 고려대를 문제 삼기 위해 준비중이라는 이야기가 학교 안에 공공연히 나돌았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말 이들이 하나 둘씩 연행된 사실이 알려지고, 7월 28일 새벽 경찰이 학생회관에 진입해 ‘물증’들을 훑어갈 때부터 학생들은 곧 터질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대책위 모임을 논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건이 발표되기도 전인 8월2일부터 학생들은 ‘간첩단 조작’을 항의하는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긴급 구속으로 교수 지도력 훼손”
 현재 구속된 김청동 관련자들은 대부분 사건 자체를 부인하고 있으며, 일부는 개인 차원이나 소모임에서 학습 활동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조직 활동은 부인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경찰을 수사를 발표하면서 수배한 ‘다른 대학과의 연계를 밝힐’ 조직원 10여명 가운데, 역시 고려대 졸업생인 회사원 김도영씨를 추가로 구속했을 뿐 아직 이렇다 할 수사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학교 당국이나 교수들은 이같은 사태에 대해 아직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수사기관과 학생들 사이에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교수들은 학생들의 움직임을 걱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혐의 내용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히지는 않는다. 이 학교 이기수 기회처장은 “주사파는 학원에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기본 원칙을 따라야 하겠으나, 교육자의 처지에서 선량한 학생들이 해를 입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청동 사건으로 어수선한 와중에 이 학교 경제학과 사무실에 감금되었던 전귀희씨가 풀려난 후 사망한 사건이 터졌다. 교수들은 혐의가 걸린 학생들을 경찰에 출두시키려고 노력했다. 학과장.교수 등이 학생들의 자진출두를 권유했으면, 또 출두하는 학생들과 경찰서까지 동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이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학생들을 긴급 구속하는 바람에 학생들을 지도할 교수의 입장이 훼손되고 말았다”고 이처장은 밝히고 있다. 정부나 언론이 좀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대 담벽에 붙여 놓은 대형 현수막 속의 ‘민족 고대는 지금 학원이 아닙니다’라는 글귀 속에는 바깥 바람에 휘둘리는 이 학교의 고민과 진통이 함축되어 있다.
許匡畯 기자

전남대 “차라리 우리 영감을 가두었다면 이렇게까지 속 아프지는 않을 거요. 아들 넷을 땅에다 묻고 얻은 자식이라, 면회 가서도 제발 때리지만 말라고 얘기하요.”
 ‘전남대 김일성 분향소 사건과 관련돼 지난 8월4일 구속 기소된 전남대 총학생회 정경우(22.산공4) 투쟁국장의 어머니 박봉임씨(63.전남 영광군 백수읍)는, ’철창에 갇혀 있는‘ 아들의 얼굴이라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벌써 세 차례나 광주를 찾았다.

 농사 지어서 키운 자식의 취직 길이 영영 막혀 버린 것은 아닌지, 어머니의 걱정은 현재와 미래를 오고갔다.

 분향소 사건의 주동자로 현상금 천만원에 지명수배된 진재영(23.자원공 4)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수배망을 피해 다니며 학생회를 지휘하고 있다.

 전남대 캠퍼스의 구성원 중에는 ‘분향소 사건’에 대해 ‘긴가민가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학생들 사이에는 심정적으로 총학생회측의 ‘결백’을 믿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구체적인 물증과 구속된 총학생회 간부들의 진술을 앞세운 경찰의 수사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교수들 중에도 이런 느낌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총학생회측이 너무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있지 않느냐”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교수들의 일반적 분위기는 학생들의 ‘혐의 사실’에 개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상식 교수(사학과)는 “진실이 완전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총학생회 간부들을 ‘타도대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밝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한 교수는 “만일 언제라도 경찰 조작이 사실로 드러나면 이것은 정권 차원의 문제가 된다. 과연 경찰이 그럼 ‘모험’을 강행했을까 의문이다”라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전남대 캠퍼스에는 ‘분향소 진위’를 둘러싸고 아직도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잇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학교 당국과 총학생회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게 패고 말았다. 지난 7월15일 새벽 전남대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한 경찰이 분향소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후, 20여 명의 학생이 대학 본관에 몰려가 경찰 진입을 허락한 학교측을 격렬하게 성토하며 총장실 등 일부 사무실의 집기를 부수었다.

운동권 내부 경직성.폐쇄성으로 ‘고립’
 학교측과 총학생회측의 ‘싸움’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분향소 사건 후 교수 일동의 이름으로 된 성명서 발표, 학사 경고제 부활을 골자로 한 학칙개정 문제 등으로도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학교측은 전체 학생의 1~2%인 과격 운동권 때문에 전남대 대외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고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다수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우수한 실력인데도 ‘전남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과격운동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 대기업 입사 시험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 중에는 ‘분향소 문제’ 나 ‘남총련 관련 여부“ 를 질문 받은 학생도 있다고 한다.

 “도서관뿐만 아니라, 이 대학 전체 분위기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라는 한 교직원의 말이 암시하듯이 전남대는 93년을 기점으로 운동권의 지지 기반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NL계열도 점차 소수화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은 다른 대학도 예외는 아니지만 ‘데모의 메카’처럼 알려진 전남대에 불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은 예사로울 수가 없다. 총학생회 간부들도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학생 숫자가 현저히 줄어드는 등 지지 기반이 약화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를 극복해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박보석(화공 4) 총무부장은 “다수 학우들과의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지고 있으며, 운동 방향이나 투쟁 방법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하는 학우들도 있다. 총학생회 간부들도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남대 운동권이 이처럼 고립되어 가는 것은, 운동권 선배들의 지적처럼 내부의 경직성과 폐쇄성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와 함께, 금년 들어서만 구속 학생이 60여 명에 이르는 등 당국의 집중적인 ‘견제’도 운동권을 위축시키는 요인이라고 총학생회 간부들은 진단하고 있다.

 수배 학생들은 주로 제1학생회관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생활한다. 총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 사무실, 동아리방 등이 있는 이 공간은 전남대 운동권의‘전진기지’나 다름없다. 김일성 분향소가 발견됐다는 장소도 이 건물 2층 구석에 있는 학생들의 생활방 중 한 곳이다.

 이 전진 기지는 이제 ‘고립된 섬’처럼 되어 가고 있다. 교수들, 그리고 광주의 빛나는 항쟁 전통을 쌓아온 운동권 선배들과 이들은 이제 아무런 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광주 김경호 통신원

경상대 경상대의 교양 과목 교재《한국 사회의 이해》를 집필하는데 참여했던 교수 8명은 검찰의 3차 소환까지 거부하면서 ‘학문적 소신과 양심’이라는 방패를 들고 결연히 맞설 태세다. 그 사이 문제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사태 해석과 해결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는 학내 세력간 균열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8월4일 공동 집필자들이 기자회견을 자청했을 때까지만 해도 경상대는 곤경에 몰린 교수들 편으로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당시 문제된 교수들은 기자들 앞에서 “최근 문제된 과목의 폐강설이 나돌고 있지만 우리 총장님은 절대로 그렇게 할 분이 아니다. 총장님은 전적으로 우리와 입장을 같이한다”라고 주장했었다. 기자회견장에 모인 학생들은 이를 박수로 추인했다. 또 교수 사회에서는 사회과학대교수회.법대교수회.경영대교수회 명의로 동료교수를 지지하는 성명이 잇따랐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와 현실은 곧 다르게 나타났다. 8월11일 이번 사태에 대한 전체 교수들의 입장을 정리해 성명으로 발표하기 위한 경상대교수회(회장 황소부 교수)가 열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회의는 전혀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황소부 회장(영어교육과)은 “성명서 채택 문제가 제기됐지만 찬.반 격론만 되풀이했을 뿐 결론이 나지 않아 대학평의회에 결정을 위임했다”라고 밝혔다. 위원 32명이 참가했던 대학평의회 의결 결과 성명서 채택 건은 19대12로 부결되었다.

 이튿날인 8월12일 대학 당국은 전체 교수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성명을 내놨다. ‘《한국 사회의 이해》를 집필한 교수들과 학교의 입장은 전혀 별개이며, 문제된 교수들은 법 절차에 응해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된다’라는 총장 성명이 발표된 것이다. 그동안 사태 추이를 지켜보며 침묵을 지키던 경상대 빈영호 총장은, 이 성명에서 ‘교재 집필자를 비롯한 일부 교수와 다수 교수의 견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라고 덧붙였다.

대학내 ‘보수’대 ‘진보’싸움으로 변해
 이른바 ‘이적성 교수’와 선을 그으며 대학 당국이 내세운 명분은 ‘명예 회복과 대학 발전‘이다. 후발 대학으로서 도약을 꿈꾸는 경상대로서는 “언론의 손가락질까지 받아가며 이적 꼬리표를 단 교수들을 감싸다가는 그동안 기울였던 학교 발전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라는 것이다. 사실 경상대는 그동안 언론의 편향 보도로 이미지에 커다란 손실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이 대학 함계운 기획실장은 “당장 내년 학사 행정에 차질을 빚게 됐다. 신입생 선발과 졸업생 취업 알선 등 기획실 업무에도 큰 타격이 예상된다”라고 걱정한다. 대학 당국은 관련 교수들이 공안 당국의 조사 요구에 순순히 응해 더 이상 파문을 확대시키지 말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학내 일각에서는 대학 당국의 이같은 사태 처리 방식에 뭔가 다른 요인이 개입해 있다고 본다. 일부 세력이 이번 기회를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의 이해》가 교양과목으로 채택된 이후의 사정을 더듬어보면, 이같은 분석을 근거 없다고 일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사태 발생 정에 있었던 이 과목에 대한 존폐 논쟁은 그 중 하나다. 논쟁은 《한국 사회의 이해》가 학생들 사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릴 때쯤, 경상대의 일부 교수들 사이에서 “일부 교양과목 때문에 학생들이 전공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부작용을 막기 위해 교과 과정을 개편해야 한다”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시작됐다. 물론 이같은 논리를 반대하는 쪽의 반박도 따랐다. “학생들은 교양과목에 빼앗긴 쪽에서 위기 의식을 느낀 나머지 악선전을 편다”라는 것이다.

 경상대 교수들 사이에 이른바 ‘보수.진보’의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0여년전이다.진주농과대학이 종합 대학인 경상대로 승격한 지난 79년 이후 교수 인력이 크게 부족한 인문.사회 과학 분야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면서, 진주농대 시절 중추를 이뤘던 교수진과 전혀 성격이 다른 새로운 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한국 사회의 이해》와 그 강의는 새로 형성된 이른바 ‘진보파’교수들의 대표작이다.

 경상대 사회과학대의 한 교수는 “현재 상태대로라면 파벌간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질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설혹 공안 당국이 경상대 교재의 이적성 수사에서 손을 떼더라도, 문제됐던 교재가 보수파에게 좋은 공격거리로 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진보파의 저항도 완강할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학문’과 ‘이적’을 둘러싼 교수들과 공안 당국의 싸움은 경상대 내부 ‘보수’와 ‘진보’의 싸움으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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