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세력 있는 곳에 권력이 존재한다
  • 서명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1.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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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전경련 지배현상 두드러져 재야 등 진보진영. 안기부 영향력 퇴조

 예나 지금이나 국민은 한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향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박사 위에 육사, 육사 위에 보안사, 보안사 위에 女史” 등 권력관계를 둘러싸고 지난날 시중에 나돌던 농담들도 이 예민한 관심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집단의 실체와 그 역학관계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이런 농담들은 끊이지 않고 재상산돼왔다.

 《시사저널》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여론조사를 통해 ‘현재 우리나라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체 혹은 집단이나 세력’에 대한 질문을 전문가집단과 일반국민에게 3년째 던지고 있다. 그 대답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세력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조사결과가 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과 그 비중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문가와 일반국민이 울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력과 실제로 사회를 ‘움직이는’ 세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여론조사는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집단의 세력변화는 물론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구조변화를 짐작케 하는 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2년 연속 ‘가장 힘있는 집단’ 민자당
 민자당은 전문가집단(33.5%)과 일반국민(50.5%) 양쪽 모두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가장 힘있는 세력’으로 꼽혔다. 물론 지난해(도표 참조)에 비해 그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긴 했지만, “정당”이라는 응답(전문가 16.3%, 일반국민 6.6%)까지 감안하면 그 비중은 다소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과는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집권정당으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창간 첫해의 여론조사에서 당시 여당을 꼽은 응답자가 11.9%(9위)에 그쳤음을 떠올리면 큰 변화인 셈이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는, 13대 총선이 빚어낸 여소야대 상황으로 말미암아 집권정당으로서의 존재를 상실할 정도로 위기에 처해 당정회의에서조차 번번이 행정부에 밀리는 등 상당한 무력감에 시달렸던 당시 민정당의 위상을 여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민정당은 90년 2월 민자당 창당으로 보수정치 세력의 대대적인 재편을 꾀한 결과 지난해부터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올해에는 기초의회·광역의회 선거에서 기대 이상의 압승을 거두는 등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었다. 대권주자를 둘러싼 당 내분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은 저조한 투표율과 안정희구 심리에 힘입어 확고한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던 서울 부산 경남지역에서조차 유례없는 압승을 거둠으로써 정치 하부구조의 강력한 기반을 형성했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내년에 행해질 4대 선거를 주도하며 착 대통령을 만들어낼 가장 유력한 정당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문가집단에 비해 유권자인 일반국민이 민자당의 영향력을 더 크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선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민자당에 이어 두 번째 세력으로 떠오른 집단은 전경련. 올해로 창립 30돌을 맞은 전경련은 연매출 6백억원 이상의 4백61개 기업을 회원사로 거느리고 있는 재계의 대표적인 민간단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대재벌의 목소리가 주도하고 있다. 전문가집단이 “재벌”이라고 대답한 비율(6.6%)까지 합치면 재벌집단의 영향력을 꼽은 응답자는 37.5%로, 이는 재벌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내건 3공화국과 5공화국에서도 재벌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권력에 의해 ‘육성’되거나 혹은 ‘공중분해’될 만큼 정치권에 그 위상이 종속됐던 것이 그간의 재계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3저호황을 바탕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상당한 저력과 역동성을 가지게 된 재계는 87년 대통령선거 이후 각종 선거로 막대한 정치자금 동원이 불가피해진 정치권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치권력에 의해 ‘육성’되어온 재계가 권력을 ‘선택’해서 밀어줄 수도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최근 현대그룹 및 일련의 기업에 대한 정부의 세무조사가 6공이라는 기존의 정치권력과 재계의 갈등양상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러나 일반국민 가운데 재계의 영향력에 주목한 비율은 10.1%(전경련 6.3%, 현대 2.2%, 재벌·대기업 1.6%)에 그쳤다. 대신 민자당에 이어 야당(22.1%) 전대협(11.0%)을 영향력있는 집단으로 지적했다. 전문가집단과 매우 다른 ‘현실인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야당과 학생운동 단체의 역할에 대한 국민의 기대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어느 쪽이 더 정확한 현실인식인가는 단언할 수 없지만, 권력의 실체에 상대적으로 가까이 접근해 있는 전문가집단이 변화를 더 빨리, 민감하게 파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군부의 경우 전문가집단에 의해 5위(13.5%)로 지목됨으로써 여전히 영향력있는 집단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를 89년의 조사결과와 비교하면 흥미롭다. 당시 전문가집단의 41.1%가 군부의 영향력에 주목했던 것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졌다. 일반국민 사이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아예 10위권 밖(1.3%)으로 밀려났다.

 “아들을 낳으면 육사를 보내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지난 30년간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해낸 파워집단인 군부의 순위 하락은 근본적으로 남북관계의 진전과 동서 냉전체제의 와해 등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관련, 올해가 국회에서 국방예산 삭감과 장성 인원문제가 거론되는 등 그동안 성역화 됐던 군문제가 ‘이야기된’ 원년이라는 점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보수블록 내에서의 군의 세력 약화는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게 정치학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가장 뚜렷한 변화는 진보적 변혁운동 세력의 명백한 퇴조현상이다. 전문가집단은 지난해에는 소위 ‘全씨 5형제’로 불리는 운동세력 중 전대협(11.4%) 전민련(10.4%) 전노협(9.7%) 등 3단체를 10위 안에 언급했다. 그러나 올해는 영향력 10위 안에 유일하게 학생집단(6.1%)만을 남겨두었다.

 진보진영의 세력 약화는 예상 가능했던 일이다. 지난해부터 일어난 동유럽의 변화에 이은 소련의 급격한 변화흐름 속에서 국민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운동권의 영향력은 자연히 감소될 수밖에 없었다. 또 여기에 정원식 총리 달걀세례 사건 등으로 스스로 대중의 비판을 자초한 점, 사회전반의 안정희구 심리도 운동권의 영향력 저하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진보진영 내부의 이론가들조차 운동권이 교조적 논리로부터 벗어나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한국사회의 다원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한, 이런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에 동의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권력기관 영향력 떨어져
 진보적 운동권의 순위 변화와 함께 권위주의적 경찰기구나 권력기관의 약화도 엿보인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았던 안기부는 창간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미 6위로 처져 눈길을 끌었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안기부의 영향력을 언급한 응답자는 전문가집단에서 5.9%, 일반국민에서 2.0%에 불과 했다. 89년 1위를 차지했던 청와대(72.5%)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올해 전문가집단의 5.1%만이 청와대를 언급했다.

 그러나 이 결과가 반드시 이들 집단의 실질적인 약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즉 통일정책 수립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안기부와 청와대가 과거처럼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세련된 형태로 ‘간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국민 사이에 안기부와 청와대가 더 이상 주요한 권력집단으로 비쳐지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 국민의식이 탈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을 움직이는 세력에 대한 여론조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가 다원화·산업화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세력이 확고하게 지배하는 사회이며, 그 세력과의 갈등과 공존 관계를 통해 사회변화를 가능케 할 진보세력이나 건전한 압력집단이 아직은 형성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대신 권위주의에서 탈권위주의로 뚜렷하게 옮겨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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