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의 그날’에 한줄기 빛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1.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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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총리회담 ‘불가침선언’ 합의하면 경쟁 멈출 수도

 국방부 孫豊三 대변인은 부임 3개월만에 최근 “정부가 공격형 무기감축을 내용으로 한 획기적 군축방안을 마련, 이달 22일의 남북 총리회담에서 제안할 방침”이란 내용의 일부 신문 보도로 곤욕을 치렀다. 비록 자신이 출처는 아니었지만 ‘오보’가 나간 데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까지 냈던 그는 “군축처럼 예민한 사안에 대해 언론이 너무 앞질러가고 있어 솔직히 대변인직에 한계를 느낀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손대변인의 사퇴소동은 일단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지만 이는 요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군축’이란 용어 자체에 대해 정부가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군축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예 논의조차 금기시됐던 영역에 속했다.

 그러나 이제 군축이란 말은 盧泰愚 대통령이 유엔연설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설명하는 가운데 남북한 군축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9일의 국회연설에서도 “실효성 있는 불가침선언의 채택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밝혀 22일부터 평양에서 열릴 총리회담을 앞두고 정부가 군축안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게 아니냐 하여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번 총리회담에서는 군축에 앞서 ‘상호 실체의 인정’이라는 정부의 종전 입장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북의 ‘불가침선언’에 대해선 전향적 태도로 임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군축정책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불가침선언을 수용하되 남한에 대한 정치적 실체 인정과 상호 교류 등 우리측 조건을 담아 역제안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일부에서 기대하는 것과 같은 획기적 군축방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부연했다.

 만일 총리회담에서 남북한이 불가침선언에 합의할 수 있다면 지난 수십년간 벌여온 군비 ‘출혈경쟁’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군축’이란 동결 감축 모두를 포괄하는 ‘군비통제’개념의 일부로 무기체제와 병력의 감축을 의미하는 것이고 보면 아직은 시기상조인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군축으로 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군축당사자 간에 신뢰가 구축돼야 하나 남북한은 휴전 후 지금까지도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 입장은 ‘선 신뢰구축, 후 군축협상’
 상호 정치적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유럽에서 이뤄진 군축협상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상호감군협상’(MBFR)이 성과를 맺기까지 지난 73년부터 무려 4백72차례에 걸친 회담을 거듭했으나 결국 군사력 현황에 대한 정보교환 등 군사적 신뢰구축이 안돼 15년을 끌었다. 군축협상에 있어 상호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 사례다.

 정부는 작년 2월 국무총리실 산하에 외무부 국방부 통일원 경제기획원 등의 고위실무자로 구성된 ‘안보정책실무단’이란 군축전담반을 설치했다. 아직 확정된 군축안은 마련해 놓고 있지 않으나 △남북한의 상호 체제 인정과 평화공존 △신뢰구축 조치 △군축협상 등의 수순을 밟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이같은 정부의 입장은 선 신뢰구축 후 군축협상이란 ‘스톡홀름 방식’에 따른 것이다. 지난 86년에 체결된 스톡홀름 협약은 군사적 신뢰를 구축할 조치를 마련키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협약은 군사활동의 사전통고와 훈련참관단의 초청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밖에 연중 군사활동 계획도 통고토록 하고 있으며 합의사항의 준수 여부도 확인할 수 있는 검증제도를 마련했다. 이는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확실히 구축해 군축협상에 유익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청와대의 한 당국자는 “우리는 북한보다 더 상세한 내용을 담은 군축안을 마련했다. 다만 북한이 전향적 조치를 위할 때 그에 따른 대응카드가 나올 것”이라고 밝혔을 뿐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그러나 이 당국자는 “신뢰구축 후에야 군축에 들어갈 수 있다는 대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북한 군축안은 무엇보다 남한과 불가침선언을 채택해 주한미군의 철수를 거론하고 미국과는 평화협정을 체결해 현재의 휴전협정을 대체하자는 내용으로 압축되었다. 특히 작년 5월31일 북한이 제안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군축안’은 ‘북남신뢰조성’이란 제목 아래 △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 군당국자 간의 직통전화 설치 △ 군사공동위원회 구성제안을 담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군축안이 두가지 점에서 큰 문제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남한의 법적 실체를 인정하는 조항이 없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군사적 신뢰를 구축할 조치와 관련, 북한은 병력을 3~4년내 10만으로 줄이자면서도 막상 전차와 자주포등 기습공격용 무기로 무장한 부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북한안은 ‘신뢰조성’이나 ‘군비통제’등 남한과 같은 군축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바로 이같은 모호한 태도로 인해 남한의 불신을 사고 있다.

북한 핵사찰 불응, 향후 정세 걸림돌
 정부의 한 고위실무자는 “북한이 남한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인식변화가 있을 경우 군축은 양측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 일사천리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정치적 신뢰구축의 한 방안으로 작년 12월 총리회담 때 북한측에 제안했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의 채택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기본합의서를 지난 72년 동서독 간 ‘기본합의서’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이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굳이 합의서 채택은 고집하지 않고 있다. 다만 △ 남한에 대한 정치적 실체 인정 △ 남북 상호 교류는 받아들여줄 것을 바라고 있다. 정치적 신뢰구축은 정부의 대북 군축협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원칙으로 굳어진 느낌이다.

 북한문제전문가 金南植씨는 “정부가 기본합의서의 채택을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군사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둔 채 군축의 실마리를 풀 수 없다”면서 “군축과 교류를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일부에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함으로써 이미 한반도에 2개의 실체가 있다는 점이 인정됐고, 대내적으로도 총리회담 등 각종 남북회담에 응하는 것 자체가 북한이 이미 남한을 정치적 실체로 인정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향후 군축협상과 연관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는 주한지상핵은 부시 미 대통령의 전술 핵 폐기선언으로 그 매듭이 풀릴 전망이나 북한의 핵개발 논란은 태풍의 눈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외교안보연구원 尹德民 교수는 “북한이 핵개발을 자신의 체제유지는 물론 정치심리적 안전판으로 여기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북한이 핵사찰 불응과 함께 핵개발 의도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이는 향후 한반도 정세에 극히 불안정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한·미 양국 정부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군축의 시계는 사실상 제로인 셈이다.

 결국 남북한 군축문제의 장래는 국제적인 여건의 성숙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 뿌리 깊은 상호 불신감 때문에 먹구름이 낀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따라서 한반도의 군축이 이뤄지려면 무엇보다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할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서두를 필요는 없으나 다만 지금과 같은 신데탕트 무드에 발맞춰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려대 康聲鶴 교수(정치학)도 “북한사회에도 소련식 개방책이 필요하며 그에 따른 주민들의 의식이 성숙될 때 군축도 가능하다고 본다”고 진단한다.

 오는 22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총리회담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이후 처음으로 군축에 대한 양측의 입장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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