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처럼 찍힌 죽음"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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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시작인 이야기》펴낸 하창수씨

 올해 제 24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작가 하창수씨(31)가 최근에 출간한 첫 중단편집《지금부터 시작인 이야기》(책세상 펴냄)는 작가가 80년대 초반에 체험한 군대 이야기를 주조음으로 하고 있다. 79년 영남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 《민법총칙》과 《재무관리》 따위의 두꺼운 책들과 씨름하며 공인회계사를 꿈꾸던 그는 80년 5·18이후 “무슨 폐업한 회사처럼 문을 닫은?? 대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군에 입대한다.

 논산훈련소 더블백 비무장지대 자동소총 불침번 대인지뢰, 그리고 “힘껏 눌러 찍은 도장처럼??선명한 죽음들을 거쳐 제대한 그는 군대에서 새긴, 혹은 찍혀진 그 ??도장??들을 소설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젊음을 상징하는 최후의 낱말이 군대와 죽임이었다. 87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중편<청산유감>이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젊은 작가들은 오랫동안 금기의 자물쇠로 채워져 있던 군대 문제를 열어젖혔다. 그 선두 주자들이 고원정 박상우 하창수씨 등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이 군대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개인의 대항논리에 초점을 맞추는 거시적 관점인 데 비해, 하씨의 소설들은 군대라는 조직 사회를 직시하기보다는 그 속에서의 개인과 실존의 문제를 미시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번 창작지 맨 앞에 실린 데뷔작 <청산유감>은 “기억에서 단 한뼘도 벗어날 수 없는 이 거대한 세계의 콤플렉스??를 불구적인 인물들을 통해 형상화한다. 전봉준과 동학혁명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 ??나??와 군대에서 제대하고 군데에서 겪은 사건 때문에 방황하는 동생, 그리고 스승인 민교수와 그의 부인 등의 문제적 인물과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80년대의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세계와 개인은 어떻게 관계하는가???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역사와 민족 등과 같은 거대 논리에 함몰된 개인들을 섬세한 문체로 드러낸다.

 《지금부터…》는 그의 장편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과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 월북에 실패한 동료를 사살하는 병장, 월북한 친형 때문에 조사를 받다 자살하는 병사 등 죽음과 죽임, 자해와 자폐 등 상처를 입은 채 인간의 세계로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을 그린 장편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과 이번 중단편집의 인물들은 서로 겹쳐지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결국 <청산유감>에서 동학혁명을 재해석하며 “개인은 곧 세계??라고 강조했듯이 그는 군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개인내면의 실존 문제를 돌출 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소설이 개인의 존재론에 치우치고, 또한 감상적이며 관념적이 아닌가라는 시각에 대해 그는 “내가, 나의 문학이 이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이 그러하다??고 말했다. 감상이나 관념을 비난의 뜻으로만 사용하는 문단풍토가 그에게는 불만으로 보였다. ??소설은 곧 체험??이라는 그에게서 글쓰기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일은 기쁘지만, 그 때문에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드는 답답함도 느껴진다. 하지만 누구보다 작가 자신이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신예작가의 ??지금부터 시작인 소설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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