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라크’ 향한 뜨거운 경주
  • 서명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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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서울시장 누가 뛰나 / 여권 ‘지연전’, 야권 ‘공개전’

 자크 시라크. 그는 77년 1백4년 만에 파리 시장 선거가 실시되자 총리직도 미련없이 내던지고 첫 민선시장의 영예를 거머쥐어 오랫동안 프랑스 대통령 못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시라크라는 이름은 한 나라 대통령에 버금가는 수도 시장의 영향력을 거론할 때마다 고전처럼 인용되곤 한다.

 ‘한국판 자크 시라크’의 출현을 예고하는 민선 서울시장 선거는 내년 6월에 열린다. 아직 열 달이나 남아 있다. 그러나 민자당 김덕룡 의원이 민자당 서울시 지부장에 임명된 것을 계기로 그동안 잠복해 있던 서울시장 선거전을 향한 관심이 부쩍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야권에서는 서울시장 티켓이 민주당내 당권 경쟁과 야권 통합의 큰 변수로 작용할 조짐마저 보인다. 서울시장 고지를 향한 보이지 않는 경주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민선 서울시장의 정치적 무게와 영향력은, 서울이 ‘서울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정치ㆍ사회ㆍ문화ㆍ경제의 집중도가 높은 현실을 감안할 때, 여느 나라 수도의 시장 못지 않으리라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우선 서울시 인구는 1천92만여 명(93년 12월 현재)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나 된다. 올 서울시 예산은 일반회계 3조4천2백53억원에 특별회계 4조5천5백9억원으로 8조원을 넘는다. ‘하루 평균 백억원(일반 회계)을 결재하는 자리’가 서울시장 직인 것이다. 게다가 제조업 집중도, 금융 서비스 집중도, 국민 총생산 집중도는 다른 통계 수치보다도 더 높다.

 한마디로 민선 서울시장 직은, 여권 후보가 당선될 경우에는 ‘여권내 2인자’, 야권 후보가 당선될 경우에는 ‘제2의 대통령’ ‘작은 대통령’으로 떠오를 수 있는 자리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장 직은 잘만 수행하면 다음 대권 후보로 도약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정가의 분석이다.

 물론 서울시장의 정치적 비중과 역할이 예상만큼 크지 않을 것이며, 정치적 도약의 기회라기보다는 엄청난 시련이 되리라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지난 91년 통과된 ‘서울특별시 행정 특례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3급 이상 공무원에 대한 서울시장의 인사권을 대폭 제한해 놓았기 때문에, 서울시장은 권력의 요체인 인사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 게다가 내년 6월 선거에서 기초자치단체장인 각구청장이 선출되면, 서울시장은 아래로부터 ‘견제와 압력’을 받게 된다. 정치적 기회라는 측면에서도 민선 시장은 임기중 실시되는 97년 대선은 물론이거니와, 그 다음 대권 후보로 도약하기가 오히려 힘들다는 비관론이 존재한다. 정가의 한 관측통은 “첫 민선시장은 산적한 과제와 서울시민의 지나친 기대 때문에 상처만 입고 물러나기 쉽다. 따라서 서울시장은 도약을 위한 징검다리이기보다는 가혹한 시험대나 함정이 될 공산이 더 크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서울시장의 비중과 역할을 두고 해석을 달리하는 정치권 인사들도 “서울시장 선거가 97년 대통령 선거 이전에 치러지는 가장 큰 행사”가 되리라는 데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정기국회를 앞둔 여야의 관심이 이처럼 일찌감치 서울시장 선거를 향해 달궈진 배경에는 물론 김덕룡 의원을 서울시 지부장에 임명했다는 정치적 계기가 작용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선거가 지니는 정치적 폭발력과 함축성 때문이다.

여권, 정치인보다 행정 전문가에 기대
 하지만 청와대와 민자당은 서울시장 선거 분위기가 일찍 과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최근 민자당이 지방자치단체장 공천을 선거를 한달쯤 앞둔 내년 5월께에나 실시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선거 체제를 정비하는 일이 급선무이며, 후보 확정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연 전략이 곧 서울시장 선거에 대한 여권의 무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시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야권에 넘겨주면 안된다는 민감한 상황 인식 아래 청와대와 민자당은 다각도로 후보 선정 기준과 마땅한 후보감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까지 청와대와 민자당의 잠정적인 결론은 ‘정치인보다는 행정 전문가’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럴 경우 여권 지도부가 ‘학자로서는 드물게 정치 감각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하는 정원식 전 국무총리(세종연구소 이사장), ‘행정의 달인’이라 불릴 정도로 깔끔한 솜씨를 보이고 서울시장 임기 2년을 마친 뒤 명예퇴직했던 고 건씨(명지대 총장)가 징집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최근 청와대 일부 비서들 사이에서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안이 검토됐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하지만 “절대로 공직에 다시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그의 소신이나 ‘중앙정부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정치 감각’을 중요시하는 여권의 인선 기준을 감안하면, 탁상 공론 차원에서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측은 그밖에도 소극적인 행정보다는 적극적인 경영 감각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필요에 따라 정치 감각을 갖춘 전문 경영인층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이명박 의원등 뜻밖의 인사가 징집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황산성 전 보사부장관의 경우는 민자당의 공천을 못 받으면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본업인 변호사 활동과 방송 일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그러나 야권에서는, “나는 말을 타는 사람이 아니라 마부일 뿐이다”라는 본인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김덕룡 서울시지부장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여야가 당운을 걸고 최대 혈전을 벌일 선거에 선거 문외한인 행정 관료 출신을 내세우는 것은 지나친 모험이므로, 결국은 정치인 출신을 택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한편 야권 처지에서 본다면 서울시장 직은 ‘한국의 자크 시라크’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 자리는 야당 대표보다 더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선거 분위기를 늦추고 조용하게 물밑 탐색전을 벌이는 여권과는 달리 야권의 움직임은 벌써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에서 맨 먼저 출마 의사를 굳히고 주변을 밝힌 정치인은 조세형 최고위원이다. 이밖에도 정대철 고문, 한광옥ㆍ이부영 최고위원, 홍사덕ㆍ이 철 의원이 ‘출마 의사를 가졌거나’ ‘출마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으로 지목돼 왔다. 하지만 이들의 출마설은 조최고위원을 제외하면 뚜렷한 움직임이나 본인의 의지 표명이 동반되지 않은, 설왕설래 수준이었다.

이기택ㆍ박찬종 연합 가능성
 그러다가 최근 정대철 고문이 민주당내 최대 계보인 내외문제연구회(내외연) 가입설을 계기로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비주류 쪽에 있던 정고문의 내외연 가입이 실현된다면, 이는 곧 그의 서울시장 출마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 정가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실제로 내외연측이 정고문을 영입하기 위해 서울시장 후보 지원을 약속했다는 풍문도 무성하다. 그러나 정의원 주변에서는 ‘미래의 대권 주자를 겨냥하는 정치인으로서는 너무 위험한 자리’라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서울시장 관련 여론조사에서마다 평균 34% 정도의 지지를 얻으며 가장 유력한 후보감으로 꼽히는 박찬종 신정당 대표는 공개적으로 출사표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요사이 ‘서울시장 출마 불가피론’을 부쩍 거론하고 있다. 주변의 압력과 유권자들의 지지 때문에라도 ‘안 나가기가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가 서울시장 쪽으로 사실상 마음을 굳혔다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최근 김동길ㆍ박찬종 공동대표는 이기택 대표가 통합 밀사로 파견한 이종찬 의원과의 하와이 회동에서 ‘공동대표와 서울시장 자리’를 통합 조건으로 제시했다고 알려진다. 이기택 대표 또한 박찬종 의원 영입 가능성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장을 꿈꾸어온 민주당내 인사들이 박대표에게 그 자리를 내주는 일에 쉽게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권의 서울시장 선거 전초전은 당권 경쟁과 통합 문제와도 얽혀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국정감사가 끝나고 새해 예산안 절충이 사실상 마무리되는 11월 초쯤이면 정치권의 관심은 본격적으로 서울시장 선거전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徐明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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