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코, 일본의 훈장인가 숙명인가
  • 도쿄ㆍ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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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공동화ㆍ실업 증가 우려 … 수출 위주 산업구조로 자업자득

세계에서 가장 환율 변동에 민감한 국민은 스위스인이라고 한다. 프랑스ㆍ독일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그만큼 각국 통화가 널리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마을에서는 그날의 환율에 따라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점심을 사먹으러 간다.

 반대로 세계에서 가장 환율 변동에 둔감한 국민을 꼽으라면 아마 일본인들일 것이다. 달러에 대한 엔 시세가 오랜 전에 백엔을 돌파했는데도 그 혜택이 일절 환원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통산성이 최근 발표한 한 통계에 따르면 일본 국내에서 4백20엔에 팔리고 있는 골프공이 뉴욕에서 1백34엔, 뒤셀도르프에서는 1백80엔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또 남자용 전기 면도기를 도쿄에서는 1만7천엔을 주어야 하는데 뉴욕에서는 9천4백엔, 런던에서는 1만3천엔이면 살 수 있다고 한다. 휘발유 가격은 도쿄가 뉴욕보다 4배나 더 비싸다.

중소기업들 심각한 타격 입어
 최근에 나온 경제 백서는 엔 시세가 상승하는데도 일본 국내 물가가 전혀 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로 ‘타임 래그’, 즉 시차 현상을 들고 있다. 엔 시세 상승에 따라 수입 가격이 10% 정도 하락한다고 할지라도 도매 물가는 9개월이 지난 다음(1.2% 하락), 소비자 물가는 2년이 지난 다음(0.7% 하락)에야 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엔고 현상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입 물가가 떨어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거미줄처럼 복잡한 각종 규제와 유통구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1백50만엔이면 살 수 있는 미국산 자동차가 일본에 상륙하면 거의 두배로 값이 뛴다. 일본 국내의 규제에 합격하기 위한 개수 비용과 여러 단계로 나누어진 대리점을 거치다 보면 그렇게 값이 오른다는 것이다.

 반면 엔 시세의 급격한 상승으로 지금 일본의 산업계는 큰 비명을 지르고 있다. 경단련(經團連)의 도요타 쇼이치(豊田章一郎)회장은 한 기자회견에서 “엔 시세의 적정 수준은 달러당 1백10~1백20엔이다. 1달러 백엔 시세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올해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0.8%나 줄어들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닛케렌(日經連) 나가노 다케시(永野健) 회장은 “경제 실태와 유리된 이상적인 엔고 현상을 방치한다면 일본은 산업의 공동화와 실업 증가는 물론 사회 불안까지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일본 상공회의소도 ‘급격한 엔고로 일본의 중소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중소기업청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중소기업이 입게 될 해는 막대하다. 대기업이 엔고 영향을 그대로 중소기업(하청 기업)에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조사에서 중소기업의 82%가 현재 대기업으로부터 가격 인하 압력을 받고 있으며, 엔 시세가 백엔을 돌파하면서 경쟁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러한 엔고 현상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 산업계이다. 노루마경제연구소의 리처드 구(홍콩인) 주임연구원은 “이론적으로 일본은 매년 무역 흑자액(1천3백억달러)만큼의 엔고 압력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수출은 ‘선’, 수입은 ‘악’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일본 산업계가 요즈음은 엔고 현상의 최대 피해자인양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반박했다. 일본의 산업계야말로 엔고 현상을 일으킨 가해자라는 지적이다.

 리처드 구 주임연구원은 또 엔고에도 좋은 엔고와 나쁜 엔고가 있다고 지적하고, 수입을 수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좋은 엔고이고, 거꾸로 수출을 수입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것은 나쁜 엔고라고 말한다. 즉 전자는 세계 무역을 확대시키는 효과가 있고 후자는 축소 지향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인데, 일본 경제가 엔고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입을 수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좋은 엔고말고는 선택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라고 충고한다.

 세계적 첨단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京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회장은 그것보다 아예 일본 스스로 관리 무역을 실시하자고 제안한다. 관리 무역이란 국가가 모든 수출과 수입을 통제하는 무역을 말하는데, 일본은 클린턴 정권이 요구한 ‘수치 목표’가 관리 무역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크다고 거부한 바 있다.

 따지고 보면 엔고 현상은 일본이 이 ‘수치 목표’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일어난 현상이기도 하다. 즉 미국의 클린턴 정권은 작년 정권 출범 직후부터 일본에 대해 무역 흑자 시정책으로 구체적인 ‘수치 목표’를 제시토록 요구해 왔는데, 교섭이 결렬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엔고 현상을 유도했을 거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나모리 회장이 스스로 관리 무역을 실시하자고 제안한 것은, 더 이상 엔고 현상을 방치할 경우 일본의 제조업이 궤멸에 이르는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나모리 회장이 말하는 관리 무역이란, 일본 정부가 아니라 산업계가 주체가 되어 자율적으로 수출을 관리하자는 얘기이다.

불황 탈출 가로막는 ‘발등의 불’
 그러나 통화 가치 상승이 경제에 마이너스 효과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엔 시세가 상승한 만큼 수입 물가가 하락하여 실질 소득이 상승한다면 일본 국민들로서는 엔화가 강해지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 평론가 마키노 노보루(牧野昇ㆍ미쓰비시종합연구소 상담역)씨는, 엔고 현상이 ‘선진국의 숙명이자 훈장’이라고 강조한다. 그는〈산케이 신문〉의 칼럼에 기고한 글에서 ‘요즈음 언론과 산업계는 엔고 현상에 대해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 경제가 금방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착각을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엔 시세 상승으로 일본의 제조업이 공동화 현상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일본의 훈장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일본 제조업의 생산 거점 이전율, 즉 공동환율은 현재 6.8%에 이른다. 미국이 20% 이상, 독일이 10% 정도이기 때문에 일본이 독일 수준에 육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잘라 말한다.

 일본의 유명한 외환 전문가 미즈타니 겐지(水谷硏治ㆍ도카이은행 종합연구소 소장)씨도 엔고는 일본의 숙명이라고 지적한다. 즉 장기적으로 볼 때 엔고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이므로 아예 이번 기회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엔고 현상은 지금 일본 경제의 불황 탈출을 가로막고 있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엔 시세는 과연 어느 수준에서 안정될 것인가.

 미국 국제경제연구소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은 최근〈일본경제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엔 시세는 달러당 90~1백10엔이 가장 적정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버그스텐 소장은 클린턴 정권에 영향력이 큰 인물로서 작년 초 “엔 시세는 백엔이 가장 적합하다”고 발언하여 외환 시장의 격변을 주도했던 주인공이다.

 그는 일본의 경상 흑자 증가율이 최근 둔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올 상반기 일본의 수입(수량 기준)이 작년에 비해 13%나 늘어난 반면, 수출은 1% 증가에 그친 점을 그 예로 들었다. 따라서 앞으로 6개월 안에 엔 시세는 백~1백10엔까지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내다보았다.

 반면 일본의 내수 확대가 늦어질 경우 엔은 또다시 90엔까지 상승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하면서, 때문에 엔 시세는 당분간 백엔을 축으로 상하 10%의 변동을 보일 것으로 내다보았다.

 게이로 대학의 오미 히로시(大海宏) 교수도 비슷한 이유로 “엔 시세가 반전될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지적하고, 빠르면 2~3개월안에 1백5엔 정도로 회복되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또 내년 초에는 무역 흑자 축소로 엔이 1백10엔까지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측했다.

 환율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각국의 경제조건들이다. 일본의 제조업이 공동화하는 것을 바라볼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훈장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은 바로 일본인들 자신이 선택할 문제인 것 같다.
도쿄ㆍ蔡明錫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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