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자본 소프트웨어
  • 원광연(한국과학기술원 교수ㆍ전산학) ()
  • 승인 1994.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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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라는 용어는 사람ㆍ장소ㆍ화제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소프트웨어(머리)는 잘 안돌지만 하드웨어(신체)는 좋다’라든지, ‘소프트웨어(기술)는 있는데 하드웨어(자본)가 없다’라든지. 쉽게 말해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은 하드웨어, 그렇지 않은 것은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는 영화, 비디오, 음반, 컴퓨터 게임 등 영상물을 가리키기도 한다(영상 소프트웨어). 영상 소프트웨어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역시 배우ㆍ감독ㆍ가수에게 맡길 수 없다. 두 소프트웨어는 어쩌다 같은 낱말로 표현한다는 점말고는 별반 공통점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둘 사이에서 흥미있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수출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 시장마저도 대부분 외국 제품, 특히 미국산이 판을 친다. 둘째, 개발비는 많이 들지만 양산하는 데에는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따라서 최고인 작품, 최고인 프로그램만이 히트할 수 있다. 가격 경쟁은 별 의미가 없으므로 2등은 소용이 없다. 〈쥬라기 공원〉이나〈도끼살인〉이나 입장료는 같다는 말이다.

  영상 소프트웨어 시장이 은하계보다 크다는 주장, 영상 문화는 그 나라의 지성과 문화를 대변한다는 논설, 프랑스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다른 것은 양보했어도 영상 소프트웨어 시장만은 끝까지 고수했다는 보도, 영상산업은 장래 국가 기반 산업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예측, 그리고〈쥬라기 공원〉영화 한 편 수입료가 조그만 나라 1년 예산과 맞먹는다는 사실들은 이제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최근 정부는 영상 소프트웨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영상진흥법을 만들고 있다. 필자도 이 법 제정에 자문하는 ‘영상산업 발전 민간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영상 소프트웨어 전문가들 틈에 유일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전문가로서 말이다. 영상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영상진흥법과 같은 법률을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하다. 세제상의 불이익 제거, 시설 투자, 갖가지 규제 완화, 기금 조성 따위는 비교적 쉽게 명문화할 수 있고, 정부의 강력한 의지만 있으면 실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발전 위해 창조력 가진 인재 필요
  그러나 이것은 전체 이야기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영상 소프트웨어와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세 번째 공통점을 살펴보자. 시나리오, 스토리 보드, 촬영, 편집, 프리뷰를 제작하는 과정은, 용어는 다를지언정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각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술 또한 공통점이 꽤 많다. 최고의 창조력과 극도의 집착력을 요구한다는 점도 같다. 따라서 이 두 분야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머리(현상을 뛰어넘는 창의력)와 가슴(뜨거운 정열)을 지닌 인재를 키워야만 한다.

  문제는 인재 양성의 어두운 장래이다. 20여년 전 한국과학원을 세워 이공학 분야의 고급 인력 양성을 꽤했던 것처럼 영상산업 분야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시도해 봄직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이 창의성에 있다고 볼 때,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어렸을 때부터 창의력을 길러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진취적ㆍ창조적ㆍ자발적인 인성을 진작시킬 수 있는 교육 체제와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은 두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나라 장래 그 자체이다.

  중학교 학예회에서 학생들 스스로〈레미제라블〉을 무대에 올리고, 고등학교 졸업기념으로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뮤지컬을 기획ㆍ공연하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서울대 졸업생들이 영화제작사에 취업하기를 원할 때, 컴퓨터 학술대회에 영화감독이 초청되어 연설할 때, 우리는 우리 문화 수준에 걸맞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이루어졌음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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